덕률풍

by skyvoice posted Feb 0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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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률풍.png

덕률풍, 애 업고 갓 쓰고 구경하는 거나 총 들고 구경하는 건 古今同

 

   1876년에 벨이라는 미국 사람이 우리나라 말로는 덕률풍(德律風)이라는 전어기(傳語器)를 발명했는데 우리나라에는

1882년에 상운이라는 사람이 처음 도입 했다. 이때는 120m 거리에서만 통화가 가능했다.

1898년에 궁내부에 3대, 각 부에 한 대씩 해서 총 10대가 가설됐고 덕수궁에 교환대가 있었다.

   고종은 덕률풍을 좋아해 아랫사람들에게 칙교(타이르는 말)를 내릴 때면 내시가 미리 칙교를 받을 당사자에게 알려주면 당사자는 붉은 띠를 두른 조복을 입고 상투를 고쳐 세우고 준비를 하고 있다

전화벨이 울리면 덕률풍을 향해 네 번 절하고 엎드려 두 손으로 공손히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대고 있어야 했다.

어떤 신하들은 “외국에서 들여온 요상한 기계로 황제의 목소리를 전함은 황제의 권위와 국가의 체면을 위해서도 아니 될 일이옵니다.”라고 아뢰기도 했다.

고종은 조대비의 동구릉에 문안을 덕률풍으로 대신했다. 수화기를 참봉능직이가 묘에 대고 있게 하고 고종은 조 대비에게 문안을 드렸다. 고종이 죽은 다음 순종도 덕률풍을 고종이 묻힌 홍릉에 가설하고 문안을 했다.

덕률풍을 관리하는 한성전화소가 생기고 1902 년에 한성과 인천사이에 전화가 개통됐다.

이때부터 일반인들도 덕률풍을 쓰기 시작했다.

   덕률풍이란 말은 “텔레폰”이란 영어를 중국식으로 음역한 것이다. 크기는 세로 50cm, 가로 90cm 다. 일반인들은 궁중에서와 달리 전화를 꺼려 해 좋아하지 않았고 덕률풍(風)의 마지막 자가 바람풍자이어서 그랬는지 덕률 바람이 불어와서 가물고 농사가 안 된다고도 하고 덕률풍속에는 귀신이 들어 있다는 소문도 났다.

전화가 오면 벌 벌 떠는 사람도 있었다. 덕률풍 옆에는 대화를 감청하는 전어감사란 관리가 숨어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는데 덕률풍으로 전화할 때는 상대방이 누구 인줄 보지 못 하기 때문에 함부로 상스러운 말이나 예의에 어긋나는 말이나 협박하는 말이나 거짓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마치 아프리카의 어떤 곳에 한국 사람이 사진관을 내는데 선교사로 와 있는 목사가 “사진관내면 망한다.”면서 극구 말렸다. 여기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 혼이 나간다는 미신 때문에 절대 사진을 안 찍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진관을 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안 오더니 얼마가 지나면서 하나씩 둘씩 와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에 나온 자기 얼굴을 보고 신기해서 너도나도 사진을 찍으러 와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1876년 개항하자 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사진을 알게 되었다. 그 때까지 우리나라에는 사진이 없어서 신문에도 사진이 없다.

  우리들이 지금 볼 수 있는 흑백으로 된 이조 말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의 사진은 다 외국인들이 찍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개항되기 전까지는 쇄국정책으로 서양에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나라였다.

한국은 “금단의 나라” 또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1885)”라고 미국의 천문학자 로웰(Percival Lowell)이 처음 말 했다.

큰 사건인 러일 전쟁과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서양에 우리나라가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다.

1800년대 말에 일본사람들이 들어와 생명관, 봉선관, 옥천당이란 사진관을 냈다.

   한국 사람으로는 김규진이 일본에 가서 사진 기술을 배워 와 1903년에 사진관을 냈다.

여자들은 여자사진사가 안방에서 사진을 찍어 줬는데 음력 정월이 되면 사진관 앞에 내외국남녀가 1천 여 명씩이나

모여 수용할 수가 없었다고 <대한 매일 신보>가 1908년에 보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진 값을 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 3 년 만에 그 사진관은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러일전쟁 (1904)중에 일본군이 평양에 입성할 때 이를 구경하기 위해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성 아래위로 빼곡하게 모여 들었다.

갓을 쓴 남자, 아이를 들러 업은 아낙내들이 산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등 일본군대를 보러 나온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의주에서 일본군과 러시아 군이 전투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다.

이런 장면의 사진은 미국과 영국의 잡지사 기자들이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와서 찍은 사진 자료다.

이들 외국 잡지 기자들은 러일전쟁의 전쟁터가 조선 땅이었기 때문에 취재하러 온 것이다.

이렇게 남의나라 군대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서로 전쟁을 해도 막을 길이 없었고 남의 나라군대가 싸우는 것을

구경만 했다.

   대한제국은 외국 군대를 나가라 하지도 못하고 궁여지책으로 할 수 없이 1904년 1월 21일 “조선은 독립된 중립국”임을 선포하게 됐다. 일본 군인들은 또 2월9일에 한성에 들어와 제나라인 양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전쟁을 빙자로 판을 쳤다. 그리고 조선정부를 강압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외국잡지에 러일 전쟁에 “조선 사람들은 철저하게 구경꾼 이었다”고 소개 했다. 구경하는 조선인들의 사진은 외국에서 온 기자, 선교사, 지리학자, 여행자들이 찍은 사진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규모면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지금우리는 4대강국의 합의 없이는 한국단독으로는 군사행동이 제어 되어 있다.

그 때에 비하면 우리는 무기도 많고 군대도 많지만 아직도 구경하는 꼴이나  아닌지 그 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손 꼽아보게 한다.

그 때 우리는 흰옷을 입고 애를 업고 갓 쓴 구경꾼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의 덕률풍 강국(통신)이 되었고 많은 총(무기)을 들고만 있는 구경꾼 꼴이 되었으니 고금동(古今同)이 아닌가?  

 

-'시카고 문경' 차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