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편지-빅수근 이야기

by 이태영 posted Oct 13,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박수근 그림.png

박수근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그림이 제일 비싸게 팔리는 화가를 아시나요?

그 화가가 가난하여서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것도 아시나요?

 

박수근은 밀레가 그린 <저녁종>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합니다. 해질 무렵의 들판, 황금빛 저녁놀이 가득한

들판에서 농부와 그의 아내가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을까?’ ‘평화로운 농촌 풍경과 농부의 마음을 그려 낸 이 위대한 화가는 어떤 사람

일까? 농촌을 사랑해서 파리 근교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민들의 생활을 그려낸 화가 밀레의 그림은

열두 살 소년 박수근의 마음을 두 방망이질 했습니다.

박수근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통치 아래 있었던 1914년 강원도 양구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우던 박수근은 일곱 살이 되던 해 양구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합니다. 공부는 뒷전이고

놀기를 좋아했지만 미술 시간만은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그렸습니다. 그래서 교실 뒷벽에는 언제나

박수근의 그림이 자랑스럽게 붙어 있었습니다. 보통학교를 졸업했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던 광산 사업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박수근은 실망이 컸습니다. 상급학교에 가면 그림을

더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박수근의 마음을 눈치 챈 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은 집에서라도 그림 공부를 계속하라고 당부하

시며, 그림 연필과 도화지를 사 주며 격려했습니다.

수근은 그 재료들을 가지고 산과 들로 나가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1932년 수근이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봄이 오다>라는 제목의 수채화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합니다.

아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아버지는 물론, 다른 가족들도 모두 기뻐했습니다.

특히 기뻐한 사람은 박수근의 재능을 일찍부터 믿어 주었던 교장 선생님이었습니다.

보통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로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는 박수근입니다.

 

1940년에 결혼한 박수근은 6.25 전쟁이 끝난 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와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힘든

생활을 합니다. 친척은커녕 아는 사람조차 없는 서울에서 겨우 일자리를 얻게 됩니다.

미군 부대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이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화가가

사진을 보고 싸구려 초상화나 그려 주는 일은 어찌 보면 몹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틈만 나면 자신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부지런히 일한 덕택에 조그마한 집을 장만했습니다.

안방과 건너 방 사이의 좁은 쪽마루가 그의 아틀리에 였습니다. 화가의 작업실로는 너무 비좁았습니다.

또한 바람막이가 없어서 겨울이면 추위에 더욱 힘이 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팔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진실된 그림만을 그리자.‘ 박수근은 규칙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가

그의 작업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방안에서 아이를 돌보던 박수근의 아내는 외출

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걱정입니다. 우산도 없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빗방울은 점점 더 거세어

집니다.

아내는 우산을 준비하여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남편을 기다립니다. 잠시 후 버스에서 내린 박수근은

아내를 보지못한 채 비를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과일장수에게로 갑니다. 한 아주머니에게서 과일 세 개를

산 수근은 그 옆의 아주머니에게서 다시 세 개를 삽니다. 비를 맞는 모습이 안쓰러워 남편을 부르려던

아내는 박수근의 행동이 이상하여 그저 지켜보고 있습니다. 세 집에서 합하여 과일 아홉 개를 산 박수근은

그제서야 아내를 알아보고 웃습니다.

”당신 비가 오는데 과일을 아무데서나 사면 어때서....“ ”한 아주머니에게서만 사면 다른 아주머니들이

섭섭해 하지 않아.“

 

195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그림이 낙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마흔 셋 때였습니다. 미술계의

중진으로 불려도 좋을 나이에 낙선이라니....

박수근은 온몸의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학력도, 스승도 없이 혼자 그림만을 위하여 매달려온

지난

세월이 허망하게 느껴졌습니다. 변변한 개인전 한 번 열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뜻을 갖고 걸어온 화가의

길이었습니다.


박수근은 낙선 후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더니 언제부터인가 눈이 침침해지고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백내장 수술을 받았지만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결국 왼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화가에게 눈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박수근은 한쪽 눈을 잃고도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한쪽 눈을 잃은 뒤 몇 해 사이에 박수근의 건강은 크게 나빠졌습니다. 결국 청량리 위생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1965년 5월 6일 새벽 1시 박수근은 천국으로의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쉰한 살의

길지 않은 일생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고흐처럼 박수근도 살아 있을 때에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운한 화가였습

니다. 그러나 고흐가 그랬듯이 세상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박수근은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는

한국 화가가 되었습니다.

 

-김현숙의 글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