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 김광정교수의 시카고 이야기(12)

by 관리자 posted Aug 1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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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 시카고 대화재 (2)- 피해 규모와  1 복구>

                                                                                 

 

   1871년10월8 일요일 저녁 9시부터  30 시간 시카고를 휩쓴 대화재의 불길이 얼마나 빠르고 강했는지, 시내 곳곳에 설치되었던 소방전이 온통 녹아내려 미시간호수에서 물동이를 릴레이하여야 했고, 카메라가 남북전쟁 전에 이미 많이 보급되어 있었는데도 대화재의 실제 모습을 담은 사진이 아직까지 장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화재를 피하는 과정을 기록한 아주 많은 사람들의 일기를 읽으면 참혹함이 아비규환’ 바로 이것이었구나 싶어진다.  


하늘도 24시간 활활 타오르는 시카고가 불쌍하였던지, 10월 9 월요일 밤부터 비 (rain) 내려 준다. 7월 4일 1인치의 비가 이후 처음 내리는 반가운 비였다. 덕분에, 10월 10 화요일 아침 화재가 진압되었다. 하늘의 도움으로 불’ 잡고 나니,  피해 상황 파악과 이재민 구호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된다. 그런데, 시청과 법원이 불타버렸으니 어찌한다? 급한대로, 제일장로교회로 임시 시청을 옮긴 메이슨 (Roswell B. Mason)시장과 시의회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약탈 (looting)을 막아 비지네스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 당시 미조리 연방군단장 세리단장군의 제의로 연방군을 주요 지역에 배치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다. 계엄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취소되지만, 군대는 축소된 숫자로 시카고에 남아 비지네스경호를 계속하였다. 일리노이 주지사와는 상의도 없이 이리 하였다고 하니, 그 당시 일리노이에서 만연하였던 시카고는 자본가들의 천국이란 인식이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나보다.    

 

우리는 흔히,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의 정도만 가지고 재난의 피해 규모를 가늠한다. 이런 잣대로 피해 상황을 살펴보자: (1)전소 지역이 200에이커 동쪽으로 미시간호수, 서쪽으로 시카고강, 남쪽의 해리슨스트리트, 북쪽으로 시카고애배뉴에 걸친 지역; (2) 재산 손실은 당시   시카고 재산의 1/3인 2천만 내지 2천5백만 불; (3) 사망자는 300 추정 겨우 3백명? 시카고강과 미시간호수에 얼마나 많이 빠져 죽었는 지는 누구도 모른다; (4) 인구의 삼분지 일(1/3) 100,000명이 홈리스 -불타버린 주택을 하나에 10피트로 잡아 늘어 놓으면 100마일이 넘는다고 하고 외에도 전소는 아니지만 거주할 없는 위험한 주택은 부지기수; (5)전소된 빌딩이 17,450개 - 여기에는 시카고시청(법원), 중앙우체국, 트리뷴타워, 화이트삭스 구장, 4장로교회, Board of Trade, 스테이트 스트리트의 상가건물 등 시카고가 자랑하던 많은 빌딩들이 포함된다. ; (6) 전소된  도로가73마일,  sidewalk 120 마일, 가로등2,000 , 등.  마디로, 시카고 초중심지역의  완전 초토화. 피해를 당하지 않은 그룹이 없었으나, 가장 피해는 극빈자들의 몫이다.  이들은 끼니마다 급식소에 서서 급식을 받아야 했고 저녁마다 잘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대다수가 이민자이었던 이들은 이재민구호센터의 Undesirable poor 취급으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민자인 Mrs. O’Leary 수모를 겪어 폐인으로 생을 마감하고 그의 (화재발생 장소) 현재 시카고 소방학교가 들어 있다.

  

     화재피해가 이렇게 대규모인데, 복구가 가능할 가?  절망하고 시카고를 떠나 버리는 것은 아닐 가?  실지로, 시카고 바깥에서는 이제 시카고는 끝났다’ 보는 의견이 만연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1871 대화재는 전국과 유럽에서 답지한 구호금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침 일리노이 출신 그랜트 Ulysses S. Grant’ 대통령이 있어, 연방/주/ 정부들의 도움이 컷다. 재미있는 점은, ( 안됐다 싶어 구호금은 보냈지만) 시카고대화재는 시카고가 범한 여러가지 죄악- 예를 들면; 일요일 술집 영업은 물론 소돔/고모라같은 시카고의 퇴폐문화와 남북전쟁으로 성장했으니, 북군의 남부섬멸에 대한 책임까지-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남북전쟁 직후이니 이런 반응이 주로 남부지역에서 왔을 싶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어찌되었든, 시카고 주민들에게 재건설은 반드시 이루어야 명제가 되었다.  화재 진압 1주일 만에 200개의 영구건물 건축허가가 발급되었고, 1873년이 되면 시카고 대화재의 1차복구는 끝난다.  1 재건설은 잃어버린 것의 빠른 회복’ 목표이어서,  화재 보다  ‘ 높고, 넓고, 웅장하고, 안전한’ 시카고 건설을 위한 공사로 다운타운은 24시간 시끄러웠다고 한다.  모든 예상을 뛰어넘은 1 복구는 어떻게 가능하였을가?  


시카고리더들의 불굴의 의지’ 몫을 했지만, 시카고 산업 기반의 많은 부분이- 예를 들어, Union Stockyard, 12 개의 grain elevators, 다운타운 바깥의 철도/운하시설, 등- 화재 피해를 모면한 사실도 크게 작용하였다.  1 복구로 인해 시카고는  ‘불사조 (phoenix)’ 별명을 얻고, 시카고를 미국 제2 도시 (the Second City) 만든 2 재건설은 1차복구가 끝나고7 후인 1880년에 시작되어 19세기 말까지 계속된다.  이야기는 다음 번으로 미룬다.

 

                                                      1871.10.11. 시카고트리뷴 사설 (사진참조): 

 

CHEER UP!     세계역사에 유래없는 참사로, 지난 30년간의 성장이 잿더미가 것을 보면서, 아름답던 도시, 시카고 주민들은 결단한다.  “Chicago Shall Rise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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