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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ago rivers & portage (3).jpg

 

 

< 교수>

 

지난번 칼럼, “시카고역사 2: 교역의 교차로 , 시카고 개발 누가? 언제? ?”에서 우리는 시카고는 뉴욕 시에서 시작해서 이리운하이리호수휴론호수미시간호수로 이어지는 동부와 유럽의 공업 경제와 뉴올리안스 (루이지애나 )에서 미시시피 강을 따라 올라오는 중서부의 농업경제가 만나는  교역의 교차로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계획되고 개발된 도시로,  일리노이 주정부가 미시간호수에서 시카고 (Chicago River) 남북 지류로 갈라지는 곳까지의 지역을 --미시간호수와 (시카고 서남쪽) 일리노이 강을 연결하는 운하 (일리노이-미시간운하, Illinois-Michigan(I-M) Canal) 건설을 공약하면서-- 1830 94 주로 뉴욕 주의 투자자에게 판매하여 시작된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렇게 시카고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순수 상업도시(commercial city)로 계획되었다. 다시 말해, 시카고는 도시자체의 생산 유통으로 시작, 발전되지 않고, 원근 타 지역 생산품들이 시카고에서 교역되는 유통 센터로 개발된 것이다.

 

 여하튼, 일리노이 주정부가1830 시작한 시카고 토지 판매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순식간에 매진된 토지는 엄청나게 크게 프레임 붙인 가격으로 되팔리고, 다시 팔렸다. 당시 잭슨 (Andrew Jackson) 행정부는 급속히 팽창하는 인구 (1830 센서스의 미국 인구는 천삼백만 ) 수용할 빠른 산업경제의 발전이 필요하여, 그를 지원할 있는 저금리, 저담보 금융정책을 고수하여 전국적 경제 호황을 유지했다. 이에 힘입어, 시카고 지역 토지투자 열기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이때에 생겨난 시카고의 별명이 부동산 로또 (Real estate lottery)였다. 토지가 불티나게 팔리게 되면서, 1831 Cook County (아직 생기지도 않은) 시카고를 country seat로 하여 조직되었고, 1832년 시카고 강에 처음으로 나무로 된 다리가 놓였고, 1833년 지역 신문 (The Chicago Weekly Democrat- 1840년에 daily가 됨)이 발행되고, 1833년 시카고는 드디어 인구 300명의 읍(town)이 된다. 인구가 겨우 300명이었는데, 지역 신문은 웬 말? 신문에는 무엇이 실렸을까? 짐작대로, 온통 부동산 (토지) 정보와 부동산 관련 대리인과 변호사 광고로 도배가 되어있다. 그러니까, 시카고에는 일 년 열 두달 시카고에 상주하는 인구보다는 들랑거리는 유동 인구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city)가 되려면 상주 인구 4,000명이 필요한데, 어느 세월에 시로 승격할 수 있을까?

 

시카고 지역 토지 판매를 시작하면서 주 정부가 공약했던 일리노이-미시간 운하 (I-M운하)는 어찌되고 있는가? 시카고가 교역의 교차로가 되려면 운하 공사는 필수이고, 토지 투자 열기가 뜨거운 것을 보면 운하공사가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이었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니었다. 바로 이점이 교역의 교차로보다는 부동산 로또가 되고 말았던 시카고의 불행(?)이었다.  이미 이리운하 경험을 통해 운하건설이 얼마나 어렵고 변수가 많다는 것을 익히 알았던 동부의 기름종이들, 어떤 생각으로 시카고 토지에 투자했을까?  그들에게, 일리노이 주정부의 운하건설 약속은 얼마나 비중을 차지하였을까? 짐작컨데, 거의 대다수가 부재자 토지 소유주였던 뉴욕의 자본가와 투자자들은 운하 개통이 가져올 장기적인 시카고의 발전보다는 시카고 지역 토지 구매를 재테크 기회로 여겨 단기적인 이윤 창출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의 토지 판매는 순전히 도면에 따라 성사된 서류상의 매매였다.    시카고는 크게는 시카고강을 따라 (water) (land) 나뉘지만, 동시에 도시 안에 강은 아니라도 사람이 살기에는 힘든 습지가 아주 많았다. 그런데, 톰슨도면을 보면, 시카고는 시카고강을 제외하면 모두 평평한 마른 같아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평평하고 마른 땅이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하게 같은 크기의 126개의 집터 (lot) 갈라져 있다.  그랬을 ?  토지를 측량하지 않고도 쉽게 매각이 이루어져 빠른 기간에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함이라 한다. 부재자 투자자와 자본가들이 이를 모르고 일리노이 주정부에게 속았던 것이었을까? 절대 아니었다.  왜냐하면, 1785 대륙의회가 새로 개방되는 중서부지역의 토지를 거리에서 서면상으로 쉽게 판매하여 해당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법제화한 토지조례 (Land Ordinance of 1785) 있어, 모든 일이 완전 합법이었다.   

 

지지부진하던 I-M 운하 공사는 드디어1836년 말이 되어서야 시카고 강 남부지류 서편의 시카고 외곽 카날포트 (Canalport. 지금의 시카고 시내의 브리지포트 지역)에서 착공식이 있었다.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는 이 착공식에서 스미스 (Theophilus Smith) 일리노이 대법관이, 일리노이-미시간운하 공사의 삽을 뜨는 자리에서 시카고 인구가 20 후에는 2만명, 50 후에는 5만명, 그리고 100 후에는 10 만명이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가 관중들의 야유와 대낮부터 취했냐고, 정신 차리라며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1890 센서스에서 인구 백만명이 넘으면서 시카고는 미국 2 대도시 자리를 그후 100 고수했는데 물론 1836년에는 어느 누구도 상상불가였으니 1840년대 중반까지 시카고 인구는 교역센터가 되기에는 턱없이 미치는 상태였다. 이미 언급한대로, 시카고 시는 토지 판매가 시작되고 거의 7년이 지난 1837 34, 승격 조건인 상주 인구 4,000명에도 미치는 3,820명의 인구로 공식 출범했다.   

 

그런데, 굳이 일리노이-미시간 운하를 만들 약속을 해야만 헸었을까? 그거야 물론, 미시시피 강과 미시간호수를 연결시킬 목적으로 시카고를 개발하였으니까. 지도를 보면, 미시간호수에서 시작된 시카고 , 데스플레인 , 일리노이 강으로 해서 미시시피 강에 도달할 있을 한데, 운하가 필요했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시카고의 특이한 지질학적 특성을 알아야 한다. 지도를 보자. 우선, 미시간호수 서편 내륙에 남북으로 그어진 점선(- - - -) 보이는 , 이것이 mini continental divide이다. 시카고 강은 점선 (- - - -) 동쪽에 위치하여 있고, 강물은 동쪽으로 흘러 미시간호수로, 결국은 대서양으로 흘러간다.  반면에, 점선 서쪽에 위치한 데스플레인 강과 일리노이 강은 강물이 서쪽으로 흘러 미시시피 강으로 합류한다.  그리고 점선 동쪽과 서쪽 사이에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호수 시카고 Portage   있다.  무슨 의미인가?    강물의 흐름이 반대 방향이어서, 미시간호수 (시카고 ) 미시시피 강은 자연적으로 연결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시카고 강과 데스플레인 강으로 일리노이 강을 운하로  연결시켜야 한다. 1825 개통된 330마일의 이리운하는 일리노이 주정부에게 이곳에 96마일의 짧은 운하만 건설하면 뉴욕시와 뉴올리안스를 연결하는 해상루트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운하 건설의 비전은 1673 캐나다 퀘벡의 프랑스 정부가 미시시피 강을 찾아보라고 보냈던 마르켓-졸리엣 탐험 팀의 졸리엣이 처음 보고 프랑스 정부에 건의했으나 묵살되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뉴욕시는 영국이 관할하고 있었기에, 졸리엣의 건의는 미시간 호수와 미시시피 강을 연결하여 프랑스의 경제 이득 증진을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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