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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_GermanUSA1890map.jpg

1890년 독일인 분포

 

25.2_Germans and Irish running off with ballot boxes.jpg

1899년 반인민 포스터, "독일과 아이리시의 투표한 도둑"

 

25.3_Irish Americans 1900.jpg

1900년 아이리시 분포

 

25.4_The mortar of assimilation only Irish causing trouble 1891.jpg

1891년 카툰, "동화정책에 반발하는 아이리시"

                                                            

<김 신 교수>

 

우리는 지난 시카고 역사 이야기 #24”에서 시카고가 제2의 대도시로 급부상한 계기는1890년의 센서스에서 인구 백만 명 (1,099,850)을 훌쩍 넘긴 것이었고, 시카고 인구의 급증이 1880년에 시작된 새로운 이민 (New immigration)의 대대적 유입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시카고에 유입된 몇몇 이민 그룹들의 시카고 정착 형태를 간단히 살폈다. 물론, 시카고의 인구 증가는 1890년부터 1950년 센서스까지 지속되지만, 급증은 1930년 센서스까지이다. 잘 아는 대로, 1930센서스는 1929년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니 시카고 인구의 급증이 이민의 세기 (1820-1920)의 후반기(1880-1920) 이민으로 인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시카고는 이민의 나라미국의 ‘the 이민의 도시가 되었다.  1800년대에 이미 80여개 다른 언어가 사용된 기록이 있었던 이민의 도시 뉴욕를 앞질렀다고? 도대체, 시카고의 이민자 비율이 얼마나 되었기에?

 

우선, 미국 정부가 사용한 이민자 (Foreign stock)’ vs ‘미국태생 (Native-born American)’ 용어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1965년 이전까지, ‘이민자는 외국 태생 이민자와 미국 태생 이민자의 자녀를 포함하였기에.  달리 표현하면,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에서 이민 1(First Generation immigrants)는 현재의 이민2(Second generation)를 지칭하였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살피자면, 1890년 센서스의 시카고 인구 1,099,850명 중에 75% 이상 (최소 70%, 최대 80%)이 이민 그룹 (, 해외 태생 이민자와 그 이민자의 미국 태생 자녀)에 속한다 75%의 시카고 이민 그룹의 60% (, 시카고 전체 인구의 40%, 또는 그 이상)가 외국 태생 이민자였다. 그 이후, 시카고의 이민 그룹 비율은 계속 증가하였다. (*후에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인데, 이런 이유로 시카고는 미국에서 1차 세계 대전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던 도시가 되었다.)  

 

시카고의 도시 형성은 운하 공사에서 시작된 관계로 이민의 유입은 초기부터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20세기가 시작하는 시점이었던 시카고 역사 이야기 #24”에서 살피지 못한 Anglo-Saxon이 아닌 인종 그룹을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1) 시카고의 미국 태생 비백인 (native non-white)은 흑인으로, 1890년 시카고에 10,000-14,000(전체 인구의 1%가 조금 넘는다) 정도가 있었다. 이들 흑인 주민에 대한 자료는 아주 희귀하다. 워낙 숫자가 적았던 이유도 있지만, 정치적 파워도 미약해서 특별히 흑인 슬럼 개선을 추진한 이들 외에는 별로 통계를 모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고 한다. 여하간, 이들은 시카고 강 남쪽 33가에 조금 모여 살기는 했으나 시카고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주로 부유층을 위한 서비스업에 종사하였다. 시카고의 흑인 인구는 1893년 컬럼비안 박람회를 시작하여 아주 조금씩 늘기 시작하였지만, 두드러진 흑인 인구 급증은 1차 세계 대전부터 시작된 흑인의 1차 대이동에서 연유한다.

 

(2) 1890년대 말 시카고에서 가장 숫자가 많았던 그룹은 독일인으로 시카고 전체 인구의 25%였다이들의 원조는 일리노이-미시간 운하 공사에 유입된 독일 이민자들이었지만 가장 숫자적으로 많았던 시기는 1850년대 말-1860년대 초이다. 이들의 대다수가 1848년 독일 통합에서 밀려나 이민온 숙련기능공 (carpenter, artisans, craftsman)이었다이중에는 독일계 유대인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민 1(이민자의 미국 태생 자녀)는 시카고 시내의 시카고 강 북쪽 지류 곁 Old Town지역에 모여 살았고, 이민2-3세에 가서야 (1871년 대화재 이후에 부자들의 도시 탈출에 힘입어) 도시 내의 부유층 지역, 특히 Old Town 북쪽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1870년대에 유입된 독일인 중에는 1880년대 말 시카고에서 극렬했던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리더도 많았다. 한 마디로, 20세기 초 시카고의 독일 그룹은 이민자, 이민 1, 이민 2-3세가 골고루 섞여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초기의 독일 이민은 루터교를 포함한 개신교가 많았으나 1850년 이후의 독일 이민은 카톨릭이 월등히 많았다. 한 가지 모든 독일인 그룹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미국이 문화의 황무지라는 신념이었다. 그래서, 자녀들을 위한 독일 학교(German School)을 타 그룹보다 월등하게 많이 만들었고 독일어 커리큐럼을 고집하였다.  독일 문화의 우위성을 굳게 믿었기에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설하는 등 시카고에서의 문화활동에는 열심이었으나 미국 동화 자체는 뒷전이었다.  이러한 독일 그룹의 은근한(?) 진상 짓에 시카고의 주류 Anglo-Saxon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주류 언론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을 터. 시카고 언론은 노사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자로 독일인 무정부 주의자를 지목하며 독일 그룹에 매 타작을 일삼았고, 또한, 맥주를 마신다는 이유 만으로 술꾼이라며 왕따를 시키기도 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카고의 독일인 혐오가 급증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싶다.      

 

   (3) 1890년 당시 시카고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그룹은 아이리시이다.  1890년 시카고의 아이리시 인구는 183,844(시카고 인구의 17%)으로 이중에 70,028명이 이민자이다. 독일인이나 마찬가지로 아이리시가 시카고 이민을 시작한 것은 운하 공사에 기인한 것이지만 독일인들과는 달리 대다수가 노동자였다. 그런 연유였는지는 모르지만, 초기에는 거주 환경이 열악한, 행정적으로 시카고와 분리된 시카고 강 옆의 카날포트 (Canalport)에 정착했다. 그 후, 카날포트가 브리지포트 (Bridgeport) 지역으로 시카고에 통합되면서 그곳을 거점으로 아이리시 거주 지역이 시카고 전역으로 퍼진다. 1890년 당시에는 West & South Side에 모여 살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이 시카고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예를 들면, 1884년의 시카고 교육청 자료 (school census)에 의하면 시카고의 303 교육구 (district) 11 구역에만 주민 다수 (50%+1)가 아이리시였다. 그리고, 이 아이리시가 다수였던 11개의 교육구에 시카고 아이리시 인구의 14%만이 살았다고 한다.

 

아이리시 그룹의 특성은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충분했지만 절대 다수가 카톨릭이란 점이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개신교Anglo-American 들은 아이리시를 심하게 차별하였다. 아이리시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들은, 어느 지역에 살던지 카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ethnic커뮤니티를 형성하여 자녀 교육을 포함한 모든 일상 생활을 하였다.  1850년대 말부터는 시카고 카톨릭을 장악하였고, 경찰 직에 대거 취업하는 등 로칼 정치에 아주 깊이 관여한다. 1890년 시카고 시의원 68명 중 23(34%)이 시카고 인구의 17%였던 아이리시이다.

 

흥미로운 점 하나는 아일랜드가 아주 오랜 기간동안 영국의 식민지였고 미국 이민 후에도 미국 사회의 극심한 혐오와 차별을 겪어서인지 아이리시의 영국에 대한 반감은 아주 높았다. 그래서인지, 1차 세계대전 발발로 표면화된 독일인이 주축인 미국과 시카고의 반영국 (Anti-English) 그룹에 아이리시들이 대거 동참했는데, 1차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종결된 후에도 시카고 아이리시의 반-영국 감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고 한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의 시카고 역사 이야기 #27”쯤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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