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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_Hull House.jpg

1890년대의 훌하우스

 

16_Jane Addams.jpg

청소년들과 대화하는 제인 아담스

 

 

< 교수>

시카고 역사에서, 1871년의 시카고 대화재로 인한 재건설 이후에 반드시 우리가 볼 것은 189351 일 부터 1031일까지 다운타운 7마일 남쪽 미시간 호숫가 잭슨 팍에서 열렸던 컬럼비안 박람회 (the World Columbian Exposition)이다. 1890년에 연방정부는 1492년의 크리스토퍼 컬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신대륙 도착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에서 만국 박람회를 열겠다고 공표했을 때, 박람회 유치를 신청한 도시는 뉴욕, 워싱톤, 센트루이스와 시카고. 이 중 끝까지 경합 도시로 남은 도시는 뉴욕과 시카고였다. 모두들, “뉴욕과 시카고? 당연지사, 뉴욕!”라고 했지만 마지막 승자는 시카고였다. 19세기에 박람회는 주최국의 국력의 선전장이어서, 미국의 자존심을 내건 이 박람회를 불과 20년 전에 대화재를 겪은 시카고에서 열다니, 모두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시카고 밖에서의 반응은 어찌 되었든 이제 막 미국의 제2대도시 (the Second City)가 된 시카고에게 컬럼비안 박람회는 만천하에 시카고를 과시할 수 있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 재건설의성인식이었고 ‘bragging right’이었다. 19세기 말 미국은 서구 사회에 미국의 힘과 위대함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데, 시카고에서 분출되는 자유 자본 경제 시스템의 엄청난 에너지만큼 안성맞춤은 없었을 터. 실제로,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밀려든 엄청난 수의 방문객들은, 박람회 하나 만이 아니라 다운타운의 높고 화려한 빌딩, 북적대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파, 피서지 같은 교외와 시내 거주지, 인구 밀집이 높고 열악한 시내 빈민가, 계속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들, 그리고 이것들을 연결시켜 주는 빠른 대중 교통 수단, 등을 보고 거기에서 분출되는 젊은 에너지를 체험하고 싶었다고 했다.

 

 박람회 개최 당시 시카고는 어떻게 회자되고 있었을까? 가장 흔한 표현은 부활한 불사조 (reborn phoenix)” 가장 미국적인 도시 (the American city-young, energetic)”였지만, “극과 극의 도시 (city of extremes)”라는 말도 많았다. “부활한 불사조는 웅장한 시카고를 보여주면 되었고, “가장 미국적인 도시는 최신 기술 개발과 기업적 자유를 앞세운 강력한 젊은 경제 에너지를 내세우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극과 극의 도시는 어떻게 보여 주었을까? 

우선, “극과 극의 도시의 내용을 보자. 시카고는 백만장자들의 도시인 동시에 서방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빈민가 (slum)가 즐비한 곳이었다: 공원과 (가로수가 많은) 넓은 길이 있는 정원 같은 도시; 동시에, 도시 곳곳에 말똥들이 널려 있는 더럽기가 그지 없는 곳; 미국 금주 운동의 수도 (Frances Willard’s 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인 동시에,  주민 200명 당 1개의 술집 (saloon)이 있고, 양조업이  (시카고 산업의) 2번째인 도시; 무디 (D.L. Moody)같은 유명한 복음전도자들과24/7 공개적인 경찰의 보호를 받는 퇴폐 유흥업소가 도시 한 복판에서 영업하는 곳;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운동의 본산지이면서도 가장 혹독하게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곳; 정글 같은 노동 환경의 유니언 스탁야드 (Union Stockyard)와 풀만 타운이 공존하는 곳; 시간을 포함해 모든 것이  이고, 돈 모으는 것이 유일한 지상 목표이면서도  문화 도시를 꿈꾸는 곳. 그러니까, 시카고는 삶의 도전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끌어 들이는 마력이 있지만,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은 가지 않았으면 하였던 도시였다.  박람회를 주관한 위원회가 가장 신경을 썼던 점이 바로 이 점이었다. , 경제적인 에너지를 잃지 않으면서도 여러 다른 인종들이 화합하며 살면서 평화로운 이상향 문화도시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 점은 차후의 컬럼에서 살피겠다.

  

시카고 박람회 유치 위원회가 내세운 다른 큰 방패는 시카고가1890년 센서스부터 미국의 제2대도시가 된 점이었기에, 오늘은, 그 당시 시카고 주민의 인종적 분포를 살펴보려 한다.  1890년의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시카고의 인구는 1,099,850명이었다. 이중 75% 이상 (최소 70%, 최대 80%)이 이민자와 이민자의 자녀이다.  [참고로; 1960년대까지 미 정부는 이민자와 그들의 미국 태생 자녀들을 모두 Foreign Stock으로 분류했고, 이민자의 손주 세대를 1st Generation이라 불렀다] 여하간에, 75%의 시카고 인구의 60%, 즉 시카고 전 인구의 40% 이상이 외국 태생 이민자였다. 시카고는 도시가 운하 공사로 인해 형성되었기에 이민의 유입이 초기부터 있었으나 대화재 직후에 활발해진 점과 시카고에서 기업주 (부유층)는 주로 native whites이고 노동자 (빈곤층)는 주로 immigrant non-white minority이었던 점을 기억하며 살펴보자.

 

  

1890년에 시카고의 native non-white 10,000-14,000(전체 인구의 1%)였던 흑인이었다.  이들 흑인 주민에 대한 자료는 미약한 정치 파워와 워낙 적은 숫자로 흑인 슬럼 개선을 추진한 이들 외에는 통계의  수집 필요도 못 느껴서 희귀하다. 이들은, 남쪽 33가의 시카고 강 부근에 조금 모여 있긴 했지만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1890년 당시 시카고에서 가장 숫자가 많았던 그룹은 독일계였다. 이들의 원조는 일리노이-미시간 운하 공사에 유입된 독일이민이지만 가장 수적으로 많았던 시기는 1850년대 말부터1860년대이다. 이들의 대다수가 독일의 정치 사회의 변화를 피해 이민 온 숙련 기능공이었다.  이 중에는 독일계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민 1세까지는 시카고 시내의 시카고 강 북쪽 지류 곁 Old Town지역에 모여 살았고, 2-3세대에 가면 시내의 부유층 지역, 특히 Old Town 북쪽으로 퍼져 나간다.  1870년대에 유입된 독일인 중에는 노동운동, 사회주의 운동의 리더도 많아 미국 사회주의 정당 창설이 시카고에서 이뤄졌다.

  

그런가하면, 1890년 당시 시카고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그룹은 아일랜드계. 독일계 그룹처럼 아일랜드인의 시카고 이민은 운하 공사에서 비롯되지만 독일인과는 달리 대다수가 노동자였다. 초기에는 거주 환경이 열악한 Bridgeport (Canalport)에 모여 살다가West & South Side 로 옮겼고 곧 이어 시카고 여러 지역에 흩어졌다. 카톨릭이 절대 다수였던 아일랜드인들은 Anglo-American 개신교의 심한 차별을 당하며 어느 지역에서나 카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에드닉 커뮤니티를 형성했고, 1850년대 말부터 로칼 정치에 입문한다.

 

1890년에, 독일, 아일랜드인들 다음으로 많았던 그룹은 인구 72,000명의 스칸디나비아 나라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에서 온 이민인들. 시카고의 스칸디나비아 커뮤니티는 그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크고 모델 (model ethnic minority)인 집단이었다.  1890년에 시카고의 new-comer는 단연 폴란드인들. 폴란드계  유태인을 포함해 약 40,000명이 모두 중공업 지역인 5개 폴리시 지역 (Polish colony)에 살았다.   이들은 카톨릭이 대다수였고 그래서 카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였다. 이들과 같이 온 유대인들은 독일 유대인과는 달리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쫓겨온 가난한 층으로 the West Side ‘Poor Jews’ Quarter’에 모여 살았다. 이 외에 보헤미안 (체코)이 현재의 Pilsen (Halsted & Ashland) 지역에 정착했고, 이탈리안 이민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힘든 이민자들을 돕기 위해 생겨난 기관이 아담스 (Jane Addams)의 훌 하우스 (Hull House)이다. 1889년에 대학 친구였던 Ellen Gates Starr와 함께 Halsted Street에 있던 찰스 훌 하우스에서 공장에서 일하며 영어가 부족한 이민자들을 위한 영어 고전 감상 프로그램으로 시작하여, 직업학교, 시카고 최초의 어린이 놀이터, 박물관, 등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이민자들을 도왔다. 여기에서 또 다른 개혁 운동이 시작되기도 하였고 --; Settlement House Movement -- 아담스는 1931년에 미국 최초로 여성 노벨 평화상 수상자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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