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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끄는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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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 제출된 Granger의 헤이마켓 소요

 

 

< 교수>

 

이미 살펴본 (시카고역사#13 & #14 참조) 1871108-10일의 시카고 대화재 후 1880-1893년의 제2단계의 재건설을 오늘 한 번 더 살핀다. 시작하기에 앞서 질문 하나를 묻겠다: 1893년에 재건설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나?  답은  “No!” 시카고는 인구가 1890US 센서스에서 백만 명이 넘어 미국의  2도시 (The Second City)”가 된 후 거의 100년간 제2도시를 유지하며 성장을 지속했다. 단지, 1893년 컬럼비안 박람회를 꼭지점으로 시카고 성장 기동력이 장기적인 도시 계획 확장으로 바뀌었기에 대화재 후의 재건설 시대를 1893년까지로 표기하는 것일 뿐이다.

 

여하튼, 오늘은 시카고의 풀만타운 건설과 헤이마켓 소요를 통해 19세기 중후반의 미국의 노사 관계를 중점적으로 살피려 하는데, 먼저 대중 교통 수단의 발전을 언급한다. 대화재 후의 재건설은 철저히 다운타운과 부유층 중심이었고 재건설의 노동 역군인 대다수 중하류층은 다운타운에서 밀려났다. 어찌할 까? 시카고 시는 도시의 지리적 확장, 특히 서쪽으로의 확장과 함께 대중 교통 수단을 확산하고 발전시킨다. 시카고의 대중 교통 수단은 말이 끄는 (horse-drawn) 전차에서 케이블 (cable) 전차, 다시 ‘elevated platform의 스팀 전차로 바뀌게 된다.

 

1859년에 소개되어 대화재 때 이미 널리 사용된 말이 끄는 전차 (‘omnibus on rails’)의 속도는 기껏해야 시속 4-5마일. 그러다가 1870년대 후반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 케이블 (cable)로 움직이는 전차가 시카고에 도입되어, 1882 1월의 메디슨에서 21가 까지의 스테이트 스트릿 케이블 전차개통식을 시작으로 케이블 전차 시대가 열린다. (**사족으로, 케이블 전차 건설 비용은 엄청나서 스테이트 스트릿 전차 건설 비용은1마일에 $100,000, 4 마일의 State St. double track을 놓는 데 4개월의 시간, 1,500명의 인부, 천만 파운드의 iron & steel, 44,000파운드의 시멘트, 50,000웨건의 돌, 모래와 300,000 피트의 목재가 들었다고 한다. ~물론, 이 건설 공사에 대한 저항 세력이 만만치 않았지만, 깨끗한 10개의 차량을 연결하여 평균 시속 9-12마일로 달리는 케이블 전차, 많은 환영을 받았다. 스테이트 스트릿 케이블 전차의 개통식에 300,000명의 인파가 몰렸다.)

 

케이블 전차의 확산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지역은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남부지역(South side)이었다. 그 다음이 North side. 빈곤층이 더 많았던 West side에는 1890년에야 케이블 전차가 시작된다.  케이블 전차의 레일이 놓이면 그 주위의 토지 가격이 케이블 철로에서 얼마나 떨어졌느냐로 결정되었지만, 케이블 전차의 도입으로 거주 지역의 확산이 더 빠르게 이뤄진 것도 사실이었다. 또 하나는, 이때부터 시카고 시의 정경 유착 부패가 부쩍 늘었다. 모든 케이블 전차의 노선은 다운타운을 돌아 나오게 되어 있어 다운타운의 경제가 가장 큰 수혜자였다.

 

좀 더 빠른 전차를 찾아 1890년에 시작된 것이 elevated line에 스팀전차 시스템이다.  운행속도는 시속15 마일. 1888년에 계획되어 1890년에 개통되었는데 컬럼비안 박람회가 열릴 즈음에는 12가에서 박람회 장소인 Jackson Park은 물론, 다운타운의 Market & Madison, Lake & California를 돌아 나오는 노선이 설치된다. 이때부터 “Loop”이란 용어가 쓰였다. 케이블 전차와 마찬가지로 이 시스템도 시카고 경계를 급속히 확산시키고, 경제를 성장시킨다. 아뿔사! 부패도 UP!

 

시카고 재건설에는 밝은 면만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재건설의 여러가지 어두운 면 중에 오늘은 노동 쟁의에 대응하는 기업주와 공권력의 유착을 간단히 살펴본다. 특히, George Pullman Pullman 타운 건설에서 보인 기업주의 paternalistic 한 태도와 Haymarket bombing에서 나타난 노동 운동의 억압을 본다. 이미 언급된 대로 이 당시의 시카고에는 절대 다수가 노동자인 많은 이민이 몰려왔었고, 대다수의 기업주는 Anglo-American, , natives였다.

 

호화로운 sleeping car 사업 (Pullman Palace Car Co.)으로 재벌이 된 조지 풀만(George Pullman) 1880 526일에 시카고에서 13마일 남쪽 Calumet Lake 4,000에이커 땅에 모델 산업 도시 (one company town) 로 풀만 타운(Pullman Town)의 건설을 시작한다.  이 지역은 늪이 조금 있지만 대부분이 초원이고 북쪽으로는 open prairie로 시카고 다운타운과 연결되고, 가까이에 있는 일리노이 센트럴 철도를 통해 남부 지역으로, 그리고 호수와 강 (Calumet Lake & River)으로 미시간호에 연결되는 지역이다. 1884년이 되면, 1,000개의 주택과 타운에 필요한 공공 건물이 완공되었다. 풀만 타운을 세우면서, 풀만이 천명한 목적은 풀만 회사의 직원과 노동자들에게 좋은 거주 환경을 제공하고, 그들의 복지를 향상하는 일이었다. 물론, 노동 쟁의를 피하려는 더 큰 속셈이 있다. 이점에서, 1877 6월의 (시카고) 철도노동자 riot이 영향을 많이 준 듯. 1873, 경제 불황이 4년째 되는 해에 Martinsburg, WV에서 시작된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 (Great Railroad Strike)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중에 일어난 18776월의 시카고  철도 노동자 파업은3일간 시카고의 거의 모든 공장들에게 피해를 주었는데, 시카고 정부와 사회의 반응은 군대를 끌어 들이고, 민간인으로 구성된 민방위군을 조직, 무장시키는 등 히스테리에 가까웠다. 거의 유일하게 이런 반응에 동감하지 않았던 풀만은 새로운 더 나은 해결책으로 미국 최초의 company town 인 풀만타운을 세웠지만, 노동자들의 권익과 복지 향상보다는 social engineer로서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는 것에 더 주력했기에, 1894년에 풀만 파업과 1897년에 일리노이 대법원의 명령으로  해체되어  단기적인 해프닝에 그쳤다.

 

헤이마켓 소요(Haymarket Bombing). 188653, 파업 중이던 6천명의 노동자가 International Harvest 공장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데, 마침 shift가 바뀌어 쏟아져 나오는 strike breaker 들과 마찰을 빚었다. 회사 측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시카고 경찰과 경호인들 (security guards)에게 실탄을 장전한 총을 지급하여, 이에 2명이 죽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노동조합이 그 다음 날 Haymarket Square (Randolph St. between Des Plaines and Halsted)에서 항의 집회를 소집하였다. 비가 오는 가운데에도  1,500명이 모인 집회는 평화적으로 몇 시간 계속되었는데, 참석하였던 당시 시카고 해리슨 시장 (Carter Harrison, Sr.)이 시카고 경찰에게 곧 끝날 것이니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돌아간 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300명의 노동자들이 집회를 끝내고 돌아가려는 찰나, 갑자기 시카고 경찰 150여명이 들이닥치고 곧 경찰관들 한 가운데 폭탄이 터졌다. 경찰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여, 군중이 흩어지는 와중에 7명의 경찰이 사망하게 된 사건이 Haymarket Bombing이다. 노동자들은 얼마나 죽었는지 아예 기록이 없다.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 누가 폭탄을 제조했는지 가리지 않고 곧장 7명의 노조 리더들이 체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죄목은 폭탄 투하가 아니라, 폭탄 투하를 조장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것이었다. 체포된 7명 모두 이 죄목으로 사형 언도를 받아 이중 5명은 사형이 집행되었다.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아주 거센 항의를 불러 일으키며 무법 천지 시카고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  공포 분위기의 노동 시장을 야기시켰다. 이 사건의 언론 보도는 철저히 친-자본가 대 반-노동자로 조작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조합운동의 원조 시카고는 사라졌다. 꽤 오랜 기간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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