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역사 이야기 <43>: Bootlegging을 둘러싼 갱단 폭력의 백미 (白眉)

by skyvoice posted Oct 0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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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_Valentine_Day_massacre.jpg 43.2_Valentine day massacre 발견.jpg43.3_valentine day article.jpg 발렌타인데이 학살 (1929년 2월 14일)

 

43.4_al-capone-at-the-cubs-game-jon-neidert.jpg 43.5_Capone and Police captain John Stege.jpg

카포네, "컵스 야구장에서"                                  시카고 경찰, Captain John Stege와 함께

 

 43.6_eliot-ness-battles-al-capone-for-control-of-chicago-chicago-tribune-1930-daniel-hagerman.jpg

1931년까지 카포네 금주법 수사한 네스

                                                                                                                                                                          

 

< 교수>

오늘은 “The Chicago Outfit”이 불법 음주 (Bootlegging) 시장 독점을 위해 벌린 대대적인 라이벌 갱 몰살 작전을 결국은 양날의 검 (double-edged sword)’이 되어 카포네 몰락을 가져온1929년의 밸런타인 데이 (St. Valentine’s Day) 학살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1920117, 전국적인 금주시대가 도래하며 갱단들의 불법음주시장 독점 다툼이 치열해지자, The Outfit의 보스 토리오(Giovanni ‘Papa Jonny’ Torrio)는 갱들의 평화협상(Peace Conference)을 통해 갱단들의 담합 (시장 나눠먹기)을 주선한다. 잠잠해지는 듯하던 갱단들의 상대방 죽이기가 재개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토리오가 지시한 아이리시 갱단인 노스사이드 (Northside) 갱의 보스 오배니온 살해 사건이었다.

19241110일 아침, 노스사이드 갱의 보스 오배니온(Dion O’Bannion)은 로저스팍에 있는 자신의 꽃집, Schofield에서 꽃을 사겠다고 찾아온3명의 남성들을 마주 했다. 그 중 하나인 오랜 지기와 반갑게 악수를 하는 순간, 다른 2명이 외투 속에 감추어온 총으로 오배니온을 무참히 살해한다. 3명의 남자들은 오베니온이 평화협상을 위반하고 자신에게 돌아올 수익금 50만불을 가로챘다고 의심한 토리오가 “Go and see what you can do.”하며 보낸 사람들이다. 오베니온의 살해로 무섭게 재개된 갱들의 전쟁으로 토리오는 이태리로 돌아가고 카포네가 the Outfit을 장악한다. (**시카고역사 #42 참조)

 

1925, 미국 마피아 패밀리의 하나인 시카고 지역 갱단, Chicago Outfit (the Outfit, 일명 카포네 갱’)의 유일무이한 보스가 된 알 카포네는 저돌적이고 철저하게 시카고 갱 세계를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불법음주 판매는 물론이고 밀조 수입원을 캐나다까지 넓히는 등 미국의 불법음주 시장의 큰 손이 된다.

 

카포네가 즐겨 사용한 방법은 상대방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게 잔인하고 대담한 라이벌 살해이다. 카포네의 라이벌 갱들도 손 놓고 당하지는 않았을 터, 시카고 경찰기록에 의하면, 라이벌 갱들 간의 죽고 죽이는대형 총격사건이 1926년 한 해에만 76건이 발생했다. ‘이렇게 빈번한 총격사건을 경찰에서는 그대로 눈 감고 있었단 말인가? 시카고경찰, 썩어도 너무 썩었어!’라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총격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시카고 경찰이 용의자 체포나 범죄에 사용된 무기 추적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다. 경찰이 힘들게 용의자를 체포해도 절대로 배후나 공범자를 실토하지 않는다는 갱들의 불문율을 목숨보다 더 중히 여기는 갱 사회 풍토로 인해 대다수의 총격사건이 미해결 사건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갱단들의 경찰과 검찰 뇌물 공세도 한 몫 단단히 하였고, 어렵게 검찰에 송치되어 기소되어도 갱단의 높은 수입으로 아주 유능한 변호사를 내세워 법망을 빠져나갔다. 한 예로, 76번의 갱들 간의 총격사건이 벌어진 1926년에 알 카포네는 3명을 죽인 현장범으로 한번 체포되었는데, 구치소에서 단 하룻밤 지내고 풀려났고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카포네가 짧게나마 감옥생활을 한 것은 1929 5, 그것도 총기 불법 소지라는 죄목이었다. 살해 현장에는 항상 부하들이 있었고 카포네 자신은 매번 정당한 알리바이를 마련하여 법망을 빠져 나갔으니까.

 

여기서 한 마디: 1927년 카포네 갱의  연 수입이 그 당시 화폐로 1억 달러인데, 그중 최소 6천 내지 7천만 달러가 불법음주 사업에서 비롯된 수익이다.  이렇게 많은 수익금으로 카포네는 경찰, 검찰, 시의원,  그리고 주 정부에게 두둑한 뇌물을 상납하였고또한 로칼 정부가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프로그램 비용을 담당하기도 하고자체의 노숙자 급식소 (soup-kitchen)도 운영하였고서민들에게 의복을 나누어 주게 하는 등 공공 자선사업을 아주 크게 벌렸다시세로 (Cicero) 시 자체를 카포네 갱이 먹여 살렸기에, 시세로에서는 아무리 유능한 수사관도 카포네 갱의 불법 행위를 사소한 한 꼭지라도 탐문할 수 없었고, 카포네도 자신을 범죄자가 아닌 사회 공복 (not a criminal, but a public servant)’이라고 내세울 정도로 당당한 사회 명사로서 시카고의 얼굴 마담이 되었다. 그러하니, 그 당시 시카고의 일반 주민들은 라이벌 갱들이나 자체 갱 조직 강화를 콕 집어 겨냥한 카포네 갱의 무자비한 폭력에는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1925년 이후 시카고의 총격사건 대다수는 카포네 갱이 주도했고 카포네 갱의 총격 사건으로 시카고는 대외적으로는 범죄의 도시 시카고라는 악명을 높이게 된다. ‘눈 가리고 아웅!’ 아닐까 싶지만 1930년도 시카고 경찰의 중범죄자 (the worst criminal) 리스트에는 카포네 갱 멤버 28명이 이름을 올렸고, 보스 알 카포네는 시카고의 공적 넘버 원 (Public Enemy Number One)’의 영예(?)를 얻었다대표적 사건으로는 1926년 시카고 시내의 Holy Name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나오던 타 갱단 보스 와이스(Hymie Weiss)가 성당 층계에서 기관총으로 사살된 일과 1929 2 14일의 밸런타인 데이 학살 --St. Valentine’s Day Massacre-시카고 역사에서는 그저’the Massacre’로 불리기도 한다--이 있다.

 

1929 2 14일 오전 10 30, 2122 노스 클락 (N. Clark St.)에 위치한 SMC Cartage 회사 차고에서 벌어진 밸런타인 데이 학살은 카포네 갱이 시카고 밀주시장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노스사이드 (모렌) --오베니온이 1924년에 살해된 후 모랜 (Bugs Moran)이 장악함--을 말살시키고 다른 군소 갱들에게 잔말 말고 시카고를 완전히 떠나라는 최후통첩으로 치밀하게 계획, 수행한 것이다

 

물론, 알 카포네는 사건 며칠 전부터 플로리다 팜 아일랜드 (Palm Island, FL)의 자신의 아방궁에 내려가 있었고, 이 사건을 시카고에서 진두지휘한 사람은 카포네의 바디가드 맥군 (‘Machine Gun’ Jack McGurn)이다. 그는, 타지 사람들을 고용하여 모랜 갱에게 캐나다 산 위스키를 대량 배달하겠다며 아침 10 30분에 위의 장소(SMC Cartage회사 차고)에서 만날 약속을 받아낸다. 2122 노스 클락은 다운타운, 그것도 시청이 인접한 시내 한 복판이고, 시간도 오전 10 30분이니 그야말로 백주 대로 상에서의 약속이라 모랜 갱들도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10 30, 모랜 갱7명이 들어왔다는 망보기들의 싸인에, 훔친 경찰차를 타고 들어선 카포네 갱들, “경찰! 손 들어!”라고 외치며 모랜 갱들을 벽을 향해 돌아서게 하며 무장해제 시킨다. 카포네 그룹 중에 2명은 경찰복까지 차려 입었으니, 모랜 갱들도 어쩔 수 없이 두 손 들고 벽을 향하여 줄지어 섰다가, ‘드르륵 드르륵’  불을 뿜은 카포네 갱들의 기관총에 6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을 마친 카포네 갱들은 유유히 훔친 경찰차에 탑승하고 도주하였다. 물론, 현장을 조금 벗어나 훔친 경찰차는 노상에 버리고 대기하던 차량 몇 대에 탑승하고 시카고를 빠져나갔다.

 

22발의 총을 맞고도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병원으로 이송된 구센버그 (Frank Gusenberg)아무도 나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병원에서 사망한다. 그리고, 늦잠 자느라 현장에 늦게 도착하는 통에 죽음을 면한 (노스사이드 갱) 보스 모랜은 길 건너에서 자신의 갱 멤버들이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고 시카고를 떠나 버린다. 트리뷴 보도에 의하면, 2 18일에 최소 50명을 포함한 5백명의 시카고 갱들이 마이애미로 피신했는데, 모두 현찰로 호텔에 투숙하는 통에 마이애미 호텔 룸이 동이 났다고 한다.

 

어느 누구도 기소되지 않았던 이 밸런타인데이 학살로 카포네 갱의 위력은 더 높아졌지만, 그 잔인무도한  대담성에 미 전국의 이목이 집중되고 연방정부가 갱 소탕 작전에 개입하게 되어 카포네 갱의 몰락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929 2 14일 오전 1030, 2122노스클락의 차고에서 벌어진 밸런타인데이 학살은 금주시대 미국에서 일어난 조직범죄단 폭력의  ‘백미 (으뜸), the finest’ 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훔친 경찰차와 경찰복으로 시카고 경찰을 사칭한 점, 의심없이 벽을 향해 늘어선 라이벌 갱들을 기관총으로 살해한 잔인성이나 범행 후 유유히 차고를 빠져나와 훔친 경찰차를 몇 마일 밖에 버리고 흩어져 모여를 한 치밀한 계획에 있지 않다이런 점에서는 그 당시 카포네 갱이 벌인 여러 굵직한 사건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카포네 갱들은 항상 훔친 차량으로 범행을 저질렀고 범행 후에는 훔친 자동차를 몇 마일 밖 엉뚱한 곳에 버리고 군중 속으로 흩어지며 경찰 추적을 따돌렸다. 달콤한 초콜릿을 나누며 애정을 표현하는 밸런타인데이에 벌린 잔인무도한 일이라는 상상을 뛰어넘는 생뚱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밸런타인데이 학살의 가장 뛰어난 (?) 포인트는 무엇일가? 단연코, 오전 10 30분이라는 범행시간과  ‘2122 노스클락이라는 범행장소이다. 대낮, 시카고 한 복판에서 보란 듯 이런 대형 사건을 벌린 그 대담성에 모두들 고개를 절레절레할 수밖에 없었다. 카포네 갱단에서는 이런 대담한 살해, 상상도 못 했지?  ‘달지 말고 시카고 불법 음주시장 우리에게 넘겨!’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카포네 갱이 아니면 이렇게 대담한 일을 벌일 그룹이 세상 천지에 없다는 모랜 (Bugs Moran)의 말대로, 누구나 카포네 갱을 범인으로 지목하지만증거 불충분으로 아무도 기소되지 않아 역시 시카고!’ 하고 잊힐 수도 있었던 밸런타인데이 학살알 카포네  몰락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하며 역사에 남게 된다.

 

어떻게?  ‘밸런타인데이 학살은 상상을 초월하는 갱들의 대담무쌍한 폭력을 가능케 한 검은 돈의 위용을 만 천하에 들어내면서 금주법의 집행을 더 이상 그 당시의 관행대로 로칼 정부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점을 미국사회에 강하게 어필하여  후버 (Herbert Hoover) 대통령으로 하여금 Bureau of Investigation (FBI의 전신)에게 카포네, 잡아 들여! (Get that man, Capone!)’ 강력하게 지시한다. 믿을 만한 낭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연일 카포네라는 이름이 헤드라인에 등장하는 것에 지쳐가던 후버 대통령은 드디어 알 카포네 1930 3타임지 표지인물이 되자, ‘카포네, 반드시1년 내에 감옥소로 보내!’했다. 그렇다고, 연방정부의 카포네 소탕 작전이 대통령의 사사로운 감정에서 발단되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일단 갱의 보스를 감옥에 보내면 궁극적으로 해당 갱단이 와해된다는 범죄학 이론이 힘을 얻었고 연방정부의 재력과 수사권이라면 갱들을 소탕할 수 있겠다는 사회정서를 만연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연방정부의 카포네 소탕,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뜨거운 감자이슈가 되어 워싱톤 정가를 흔들고연방수사국 안에 카포네 전담팀이 구성된다. 그 중 몇 명은 시카고팀으로 시카고 시내 연방빌딩 안에 상주하며 카포네 수사에 올인한다.  

 

드디어 연방수사국은 알 카포네에게1929 3 12일에 연방 대배심원 (Federal Grand Jury)의 소환장을 발부한다.  ‘밸런타인데이 학살이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인데, 카포네가 이 소환에 순순히 응할 리는 없을 터, 3 11, 변호사를 통해 건강을 이유로 연기신청을 한다. 이때 제출된 의사진단서에 의하면, 카포네는 1 13일부터 2 23일까지 바깥 출입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아주 더딘 회복으로 시카고로의 여행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했다. 이 의사 진단서에서 카포네는, 밸런타인데이 학살이 일어난 2 14일에 자신은 플로리다 집에서 꼼짝 할 수 없었으니 나는 무죄!’라고 주장하려 했던 것이리라

 

이런 카포네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연방수사팀은 대배심원 소환을 3 20일로 연기시켜 준다. 그리곤 은밀히 연방수사국 마이애미 지부로 하여금 카포네의 진술이 거짓임을 밝혀내게 한다. 그리하여, 3 27일 일주일 간의 대배심원 증언을 끝내고 재판정을 나서는 카포네를 위증혐의로 체포하는데, 5천 불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카포네의 속이 부글부글하지 않았을까? 그 이후에도, 연방수사국은 총기소지 등의 소소한 문제로 알 카포네를 자주 귀찮게 한다.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것이 연방수사팀의 조사 방향을 카포네 팀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연막 작전이었다. 무슨 소리? 이는, 다음 컬럼에서 살핀다.

 

여하튼, 그 당시 시카고에는 연방수사국과는 별도로 금주법 위반으로 카포네 소탕에 힘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연방재무성 소속 금주경찰, 네스 (Eliot Ness)였는데, 그는 오랜 기간 카포네와 연루된 양조장들을 문 닫게 하여 카포네 갱의 돈줄을 원천적으로 고갈시키는 노력과 함께 카포네의 금주법 위반 케이스를 소상하게 조사하여 기록에 남겼다. 연방정부에 의해 채택되지 않아 결국은 사장되어버린 네스의 목숨을 건활약상은 그의 사후에 발간된 소설 ‘The Untouchables’에서 읽을 수 있는데, 널리 알려진 같은 이름의 영화에는 허풍이 심해 조금은 아쉽다.

 

금주법 위반이나 살인죄가 아닌 세금포탈 죄목으로 기소되고 유죄가 확정되어 1931년 감옥생활을 시작한 알 카포네의 재판과 몰락 이야기는 다음 칼럼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다른 갱들에게 최후 통첩으로 감행한 ‘1929년 밸런타인데이 학살은 카포네 자신에게도 최후 통첩의 시작이 된 날카로운 양날의 검이었다 싶다. 아주 오래 전에 본 1972년작  영화 대부(The Godfather)’ 의 갱단 보스의 살인 지시 대화,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가 보라 (see what you can do)”라는  Marlon Brando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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