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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의 시카고 인종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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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나가다 백인에게 맞아 죽은 흑인을 수습하는 시카고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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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시카고 인종 폭동의 진원지

 

 

 

 

<김 신 교수>

 

미국에게 1918-1919년은 여러 면에서 뜨거운 기폭제 (catalyst)의 기간이었다, 그때까지 미국을 지탱해 왔다고 믿었던 사회적 요건들이 크나큰 도전을 받으며 부글부글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19세기의 산업혁명과 스페니시 전쟁 (1898)이란 전조가 있었지만 그 기폭제의 직접적 촉매는 인류 사상 초유의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던 1차 세계대전 (1914728-19181111)이었는데, 비록 51개월 전쟁에 겨우 18개월 참전이었지만, 1차대전 참전을 통해 미국인들은 새로운 더 큰 세상을 접한 듯했다.  더하여, 1차 대전 종전과 함께 급작스럽게 퍼진 스페니시 독감 팬대믹이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그 와중에 시작된 1919년의 화두는 단연코 정상으로의 복귀 (Return to Normalcy)“ 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정상이고, 어떻게 정상으로 돌아 갈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성찰이나 합의점 도출 시도 없이 시작된1919년이었기에 연초부터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새해 벽두인 1 16, 18차 헌법수정안이 네브라스카 주민투표에서 비준되면서 필요한 2/3의 주(states) 문턱을 넘어 곧 이어 통과된”Volstead Act” 와 함께 1920 117일 도래할 전국적인 금주시대를 알렸고, 곧 이어 불어닥친 경제불황으로 직업을 구하지 못한 퇴역군인과 임금을 제때에 받지 못한 경찰과 교사를 포함한 노동자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렸다. 예를 들어, 1919년 어느 한 날 시카고의 시위 군중은 25만명에 달하였다는데, 이 중에는 치안 유지를 책임진 경찰과 현직 교사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더하여, 여러 유럽 백인그룹들은 두고 온 조국이1919 6 28일에 체결된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어떻게 포함될지를 두고 미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유별나게 유럽 백인 이민의 입김이 강했던 시카고의 경우를 살펴보자. 시카고의 독일계는 연합국이 조국 독일에 부과한 가혹한 전쟁 배상을 손 놓고 볼 수밖에 없는 좌절감으로 안절부절이었고, 이태리계는 윌슨 대통령이 전쟁 중에 한 비밀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려 조국 이태리를 멸시했다고 볼멘 소리를 하였다.  아이리시 그룹은 전직 시장 에드워드 듄 (Dunne)이 리드한 시카고의 아이리시 대표단을 윌슨 대통령에게 파견하여 강화 조약에 아일랜드의 독립을 명시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시카고의 아이리시들은 일차대전 종전과 유럽 정치 판도의 재편성으로 조국 아일랜드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영국 식민지 하의 역사를 털어내고 독립되기를 정말 간절히 원하였는데, 그 기대가 여지없이 허물어지니 좌절감과 무력감이 극에 달하게 된다. 참고로, 아일랜드는 1922년에야 영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하지만, 이어진 내란으로 북 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나뉘게 된다.

 

그 뿐이 아니다. 일차 대전 중 폴란드가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시카고의 폴란드와 유대계 그룹은 서로를 원수 취급하며 폭동을 벌일 기세로 으르렁 거렸다.  실제로, 1919 6월 어느 날,  12가와 켓지 (Kedzie St)에 폴란드인 5천명이 쳐들어(?) 온다는 루머에 8천명의 유대인들이 모이기도 하였고, 한 달 후에는, 유대인 식품점 쥬이시 주인이 폴란드인 소년을 죽였다는 허위 소문으로 3천명의 폴란드인들이 84가와 버팔로 가에 모여 들어 경찰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1919년 여름의 미국은 폭발 직전의 활화산같은 백인 그룹들 간의 인종갈등으로 몸살을 앓았고 시카고를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 실제로 크고 작은 200여개의 인종폭동을 겪었다. 1919년 여름을 ‘Red Hot Summer’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1919년 미국에서 일어난 인종 폭동들 중에 가장 잔인하고 특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1919년 시카고 인종폭동을 자세히 살펴보자. 1919년 여름, 시카고 주민들은 찜통 더위를 식히려 너나 할 것없이 모두 미시간 호숫가에 몰려 들었다. 이 당시, 미시간 호수에는 흑인은 25가의 비치”, “29가의 비치는 백인 전용’’이라는 불문율로 인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선이 그어 있었다고 한다.  7 27일 몇 명의 흑인 십대들이 25가와 29가 사이의 완충 지대에서 수영을 즐기는 것을 보고 화가 치민 한 백인이 던진 돌에 흑인 소년 유진 윌리엄스가 익사한다.  깜짝 놀란 친구들이  25가 비치로 돌아와 그곳에 있던 흑인 경찰을 대동하고 29가 비치로 가서 돌 던진 백인을 지적하며 29가 비치의 백인 경찰에게 체포를 요청한다. 백인 경찰은 어떻게 했을 까? 일언지하에  돌 던진 백인 체포를 거절하며 흑인 소년들과 흑인 경찰을 쫓아낸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한 떼의 흑인군중들이 항의하러 29가 비치로 몰려 갔는데 백인 경찰은 되려 흑인 한 명을 체포한다. 어떤 기록에는 이때에 흑인과 백인 간에 투석전이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투석전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투석전이 실제로 있었다면 흑인 한 명만 체포했을까?

 

확실한 것은 이 소문을 들은 브리지포트의 아이리시들이 인근 Black Belt 가장자리의 흑인 집에 침입해 테러를 가함으로 1919년 시카고 인종폭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시작되어 8 1일까지 6일간 지속된 폭동은 주로 아이리시들이 흑인들을 집 앞까지 쫓아가 돌로 쳐 죽이고 집을 부수는 양상이었고, 뒤늦게 출동한 시카고 경찰은 그저 눈 가리고 아웅식의 대응으로 일관하였다. 일하러 가던 전차 안에서 백인들의 돌을 맞고 숨지는 흑인이 나오기도 하는 등 처음 며칠 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던 흑인들이 반격을 시작하여 흑인을 뒤따라 흑인 지역 깊숙이 들어온 백인들도 사망하게 된다.

 

주 방위군의 개입과 쏟아지는 비로 인해 끝난 이 폭동의  부상자는 5백 여명, 흑인 23명과 백인 15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었고 재산피해는 백 퍼센트 흑인의 몫이었다. 공평한 조사를 한다던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은 검시관들의 소견이나 경찰의 사건 기록도 무시하고 몇 몇  백인들만의 증언을 채택하여 191984일 백인은 단 한 명도 없이 흑인만 14명을 기소한다. 누가 보아도1919년의 시카고 폭동은 백인이 주도하여 피해가 오로지 흑인 몫이었는데, “이건 해도 너무하다고 물의를 일으켰다. 조금 더 공평한(?) 조사서가 1921년에 나오긴 했다.

 

 역설적이지만 이 폭동으로 급팽창하던 시카고 흑인 커뮤니티의 위상이 올라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고 Black Belt의 주거 조건이 좋아지거나 흑인들에 대한 차별이 적어진 것은 아니다. 사족 하나: 1919년 시카고 폭동의 주동이었던 브리지포트의 아이리시 함버그 클럽 (Hamburg Athletic Club)에는 후에 전설적(?)인 시카고 시장이 된  리차드 J. 데일리 (아버지 데일리)가 총무였는데, 그는 선거 때마다 받았던 “1919년 인종 폭동에 가담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묵비권으로 일관하였다.

 

언급한대로, 거의 모든 1919년의 미국의 인종 폭동들은 흑인과 백인의 대결이 아닌 백인 그룹들 간의 갈등이었다는 점에서 이때의 시카고 인종 폭동은 예외이다. 시카고의 인종 폭동은 흑-백의 갈등, 그것도 백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흑인들을 선제 공격하며 피해를 입힌 일방적인 폭동이었는데, 폭동의 책임은 오로지 흑인들에게만 물었던 폭동으로, 1920년대 미국의 굵직굵직한 인종폭동들의 효시가 되었다.

 

다음 번에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 (1914)는 기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작았던 시카고의 흑인 커뮤니티가 불과 몇 년 만에 혹독한 폭동을 당하게 된 근본 원인, 즉 남부 흑인들의 1차 대이동에 대해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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