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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 종식을 축하하는 시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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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F North 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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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의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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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F Siberia의 병원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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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남겨진 미군 무덤

 

 

 

<김 신 교수>

 

오늘은, 1차세계대전 종전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보려 한다. 공식적으로, 1차세계대전의 전투는 1918년 열 한 번째 달 (11), 열 한 번째 날 (11), 열 한 번째 시간 (오전11)을 기해 종식되었다. 좀 더 명확히 말하면, 연합국 (the Allies)과 독일연맹 (the Central Powers)이 그 시간에 서부전선에서의 전투활동을 전면 중지하고 독일의 무조건 항복, , 종전 조약 협상을 개시할 것을 합의, 서명하였다. 이는, 독일의 마지막 황제 (Kaiser) 빌헬름 2(Wilhelm II)1918119일에 퇴위하였기에 가능케 된 일이다. 그리고, 동부전선은 이미 191833일에 러시아와의 불가침조약으로 독일의 독차지가 되었으니 서부전선에서의 정전은 곧 1차대전 종료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19181111일 오전 11시를 기해 1차대전의 모든 전투가 종료되었을까? 물론, 아니었다. 시카고 역사 이야기 #35에서 언급된 대로, 연합군과 독일군의 서부전선에서의 마지막 전투는 독일과 캐나다군이 밸지움 (Mons, Belgium)에서19181111일 오후 늦게까지 벌였던 치열한 교전이다. 전투활동 중지 합의 뉴스가 일선 부대에 제때에 전달되지 못해 생긴 어이없는 해프닝이니, 이 전투의 사상자들은 참 억울한(?) 희생을 치룬 셈이다. 그럼 1112일로써 1차대전의 모든 전투는 끝났을까그것도 역시 아니었다. American Expeditionary Force (유럽 파병 미군)로 러시아에 파병된 미군의 군사활동은 192041일까지 현재 진행형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싶지만, 자세한 경위 설명이 필요해 이 칼럼 마지막으로 미룬다.   

 

그리고 우선, 1차세계대전 종식 뉴스가 시카고에는 언제, 어떻게 전해졌을까? 그리고, 시카고는 이를 어떻게 축하했는지를 19181111일과 1112일자 시카고의 로칼 신문들의 기사들을 참조해 살펴보자. (**Harold Washington LibraryChicago Newspaper Collection에서 소상한 내용을 열람할 수 있다)   

 

19181111일 월요일 새벽 155시카고 트리뷴“Armistice signed (종전 싸인)”, Associated Press” 전문이 도착했다. 파리 (프랑스) 시간으로는 오전 855분이다. 종전소식이 서부전선의 밸지움 일선 부대보다 시카고에 더 빨리 전달되었다 싶으니 조금은 헛헛하다. 차치하고, 불과 며칠 전인117일 목요일에 ‘1차대전 종식false alert가 있었기에 트리뷴 지는 먼저 이 전문 진위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그리고, 4년에 걸친 1차세계대전 (The Great War)이 끝났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옥상에 설치된 사이렌을 크게 울리며 특종 호외를 발표하고, 시카고 경찰 (Police)국과 소방 (Fire)국에 통보한다. 소방차들은 사이렌을 울리고, 경찰은 “The War is over! 전쟁 종식!“ 외치며 텅 빈 시카고 새벽 거리를 순찰했다. 곧 다른 로컬 미디아들도 합세하여, 시카고 지역이 순식간에 온통 사이렌과 함성 소리로 진동했다.

 

이 소란에 잠을 깬 수많은 주민들은 월요일 출근? 아니지!’ 덩실덩실 춤추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소리를 내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두들겨 대면서. 어떤 이들은 부엌 냄비를 두들겼고, 다른 이들은 자동차 경적과 호루라기를 불러 댔고, 빈 소총을 공중에 쏘는 이들도 있다. 거리에 나올 수 없는 이들은 요란한 알람 소리의 시계를 창 밖으로 내밀었고, 시내를 향하는 전철들, 기차들, 보트들도 경적을 계속 울렸으니, 시카고 지역은11일 새벽부터 1차대전 종전 축하를 아주 아주 화끈하게 만끽했다.  더하여, 길거리에서, 큰 빌딩 로비에서, 광장에서, Municipal Pier (현재의 네이비 피어)에서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즉흥 댄스 파티를 벌였다. 그중 압권은 법원 건물 로비에서 판사들도 합세한 댄스 파티였다. 시카고 지역 생활권은 시카고 시, 특히 Loop중심이었으니, 사람들은 종전 축하도 시카고 시내에서라며  하루 종일 시카고 시내로 모여 들었다.  덕분에, 다운타운 메디슨과 스테이트 코너는 ‘the busiest corner of the world’란 별명을 얻었다. 망명한 빌헬름 2세의 모의 (mock) 장례식을 치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초 저녁부터 곳곳에서 모닥불 (bonfire)을 지폈고, 어스름이 깃들자 사람들은 밤새 오픈경찰의 특별 허가를 받은 바와 술집으로 몰려 들어 밤새도록 부어라 마셔라했다. 요란스러운 축하 광란을 이어 나가는 와중에 200여명이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하루 종일 시달렸던 시카고 경찰이 드디어 화요일 아침 7시 통금 (curfew) 카드를 꺼내 들으니, 이 축하 광란은 화요일 새벽 2시부터는 자진 해산하고 귀가하여 24시간 non-stop 축하는 12일 화요일 새벽에 끝난다. 그리고, 시카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12일 오전부터 일상으로 완전 복귀했다.  학생들은 학교로, 직장인들은 직장으로, 파병 군인 가족들은 돌아올 가족과의 상봉을 꿈꾸는 기다림의 일상으로필자는 가끔, 그 당시 시카고의 가장 큰 그룹이었던 독일계 미국인들은  이 축하 행렬에 얼마나 참여했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영국에 대한 증오 때문에 독일계와 손잡은 아이리시는? 남부에서 막 옮겨온 흑인들은?  

 

시카고 경찰에 따르면, 24시간1차 대전 종전 축하 광란으로 9명이 사망, 30명이 부상을 입었다. 차 사고나 총기 실수의 희생자이다. 물론, 유치장에 있던 이들은 화요일 새벽에 모두 귀가 조치되었다. 기록에 남기지도 않았다. 경찰은 백만 명 이상이 참여한 축하 광란이었으니 이만하면 괜찮다고 했다 한다.

 

미국 정부는19181111 Armistice 이후 발빠르게 징집 (draft)을 중지했고, 전쟁 수행을 위한 민간 기업과의 계약 (wartime contracts)을 중단하고, 유럽 파병 미군의 본국 귀환과 군대 해산에 올인한다. 그리하여, 불과 8개월 만인 1919727일까지 민간인으로 돌아간 군인 숫자가 3,028,487 명에 이르고, 1차 대전 파병 미군은 745,845명으로 축소된다. 파병도, 해산도 빛의 속도로 치러진 것이다.  

 

GI Bill 같은 귀환 전쟁용사들의 사회 재적응을 돕는 정책이 전혀 없는 그 당시 미국 사회에, 8개월에 3백만 명이 넘는 군인이 민간인 신분으로 노동 시장에 진입했으니 그 경제적, 사회적 충격은  불 보듯 뻔했다. 실업률 (unemployment rate)이 치솟았고, 파병 전의 내 자리로 돌려 달라는 대규모 파업과 데모가 계속되고, 고용된 마이노리티 (주로 African American)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급상승되어 1919년 미국에는 Red hot 인종 폭동이 끊이지 않았고, 1차 대전 기간동안 주춤했던 동, 남유럽 이민이 다시 재개될 듯하여 반이민 사조가 활발해졌다. 또한, 인류 역사 상 가장 처참했던 전쟁을 몸소 겪은 귀환 용사들의 심리적 트라우마에 대한 인식도 없었고, 더하여, 스페니시 독감 팬대믹이 덮쳤으니, 1차 대전 종전 직후의 미국 사회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절이어서 일상으로의 회복 (Return to ‘normalcy’)’No. 1화두로 떠올랐다. 물론, 무엇이 돌아가야 할 일상 (Normalcy)일지는 중구난방, 논란으로 부글부글했다.

 

이러한1차 세계 대전의 영향들은 차후 컬럼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고, 오늘은 앞서 언급한  러시아에서의 미군의 전투 활동을 살펴본다. 다름 아닌, 유럽 파병 미군 (American Expeditionary Force)으로 러시아에 보내진 AEF-north Russia (일명 북극곰 -Pola Bear)AEF-Siberia 이야기이다.  

 

AEF-north Russia는 미시간 주에서 훈련을 끝내고 프랑스로 향하던 약 5,500명의 신병들이 핀란드 접경 러시아 서북단에 파병된 케이스이고, AEF-Siberia는 서부 전선에 배치되었던 7,950명 미군이 러시아 동부의 블라디보스톡 (Vladivostok)에 파견된 경우로서, 두 경우 모두 연합국 (Allies) 혈맹인 영국과 프랑스의 요청으로 윌슨 대통령의 인가로 이뤄졌다. AER-north Russia AEF-Siberia를 합쳐 미국의 러시아 군사적 개입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왜, 무슨 명분을 내세워 미군의 러시아 파병을 요청했으며, 미국은 왜 파병 요청을 받아드렸는지는 1917-1921년 러시아 공산 혁명과 내란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아주 간략하게 살피면, 1914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연합국 (the Allies)의 일원으로 동부 전선에서 독일과 전투를 벌인 러시아군을 진두 지휘했던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1917223일에 St. Petersburg에서 시작된 2월 혁명을 무력 진압하라 지시했다가 역풍을 맞아 1917315일에 퇴위되었고,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벌어진 맨세비키 (Mensheviks)가 주도한 임시 정부 (provisional government)와 레닌이 리드한 볼셰비키 (Bolshevik) 간의 권력 다툼에서 결국 19171025일에 볼셰비키 공산당이 러시아를 장악한다.  그리고, 임시 정부를 제국주의(imperialist” 전쟁 (1차 대전) 철군을 관철하지 못한 무능한 정권이라  맹비난했던 러시아는 191833일에 독일과 평화 조약 (The Treaty of Brest-Litovsk)를 체결하고 연합국을 탈퇴, 1차 세계 대전에서 철군한다.  이후, 19183월 말부터 1921년 말까지 러시아에서는 소위 백계 러시아 (White Russian)군과 공산 러시아 (Red)군의 내란이 지속되다가, Red Army의 최종 승리로 19221230일에 소비에트 연방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이 형성되어 1991년까지 지속된다.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러시아 본토 군사 개입은 1918527순양함 USS Olympia가 영군이 장악한 핀란드 접경 러시아 Murmansk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몇 달 후, 191. 82AEF-north Russia 미군 부대가 13마일 떨어진Arkhangelsk (Archangel)에 상륙한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191833, 러시아 철군 이전에 연합국 (주로 미국)이 지원한 전쟁 물자를 볼세비키가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 아뿔사! 미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원 물품들이 볼세비키에 의해 더 북쪽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전쟁 물자 탈환을 위해 당시 핀란드와 러시아 접경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군 휘하에서  정규 Red Army와 큰 전투를 치렀다. 꽁꽁 얼어붙은 러시아의 겨울로 인해 후퇴도 하지 못하는 고초를 겪으며, 군인들의 사기는 맨땅에 헤딩했고, 명령 불복종 하극상 (mutiny)도 일어났다. AEF 총사령관 퍼싱 (John Pershing)의 특별 지시로 191985일에 완전 철수한다. 1년 동안 235명의 전사자를 내고.  

 

AEF-Siberia는 프랑스의 요청으로1918815일에 서부 전선의 미군 7,950명의  블라디보스톡 도착으로 시작했다. 이들의 공식적 업무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확보하는 것. ? 볼세비키의 무장 해제 명령에 불복하여 극동 러시아에 발목이 잡혀 있던 40,000명의 체고슬로박 부대원들을 안전하게 블라디보스톡으로, 그리고 체고슬로박으로 귀환시키기 위해. 이런 연유로, 미국은 절대 군사적 개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미국은 동시에 반공산주의 (anti-Communism) 자본주의 미국을 부각시키며 노골적으로 백계 러시아 세력을 후원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시베리아에서 Red Army는 그리 강하지 못했기에, 큰 전투는 많지 않았으나 --19개월 작전에 189명 전사-- 정부의 대대적인 비방 선전을 당했다. 이들은 또한 시베리아의 지하 자원을 둘러싸고 일본과 충돌하였다.

 

19181111일 종전 (Armistice) 이후, 미국 내에서 러시아 철군 여론이 거세지는 가운데, 1919년 말 White Russia 세력이 궤멸되었다. 미국의 러시아 개입의 명분이 완전히 사라진 것.  192041일 완전 철수한다.

 

당시 미군의 모습은 339부대 장교였던 John Cudahy의 책, “Archangel” 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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