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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캠프에서 일선으로 나서는 미군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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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까지 동원한 반독일 히스테리어

 

이하는 1차대전 포스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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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신 교수>

 

오늘은 시카고역사 #33에서 시작했다가,  1915724일 오전 728분 시카고 강 (Chicago River)에서 일어난  황당한 이스트랜드 (SS Eastland)” 참사 이야기 때문에 미뤘던1차세계대전 (The Great War-The First World War) 이야기를 계속한다. 오늘부터  최소 4회 정도는 더 필요할 듯한데, 오늘은 미국의 1차대전 전쟁 수행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이미 언급한대로, 1차세계대전은 1914728일부터19181111일까지 43개월 반 동안 유럽 전역과 중동 (The Middle East)과 북 아프리카에서 치러진 전쟁이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1차대전에 참전한 때는 1917 4 6일에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 후, 626일에 14,000명의 보병을 프랑스에 상륙시켜 서부전선에 미군 캠프를 구축하였고, 실제 전투 참여는 1917 1021일 프랑스 (Luneville, France)의 연합군 참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군의 첫 번째 1차대전 사망자는 1917112,  프랑스 (Bathelemont, France)의 미군 참호에 쏟아진 독일군의 포화로 인해 발생했다. 1차대전 발발 33개월 만의 일이다. 그 후 19181111일에 종전까지 1년 남짓 지속된 서유럽에서의 치열한 전투에서 미국은 전투병력 116,000명 사망, 200,000명 부상을 입었다. 316,000명 사상자는 순전히 전쟁터에서의 희생자 숫자이어서, 어떤 기록은 1차대전 미군 희생자를 500,000~650,000명까지 추산한다.

 

참고로, 미군의 1차세계대전 전투는 거의 모두 서부전선 (주로 프랑스)에서 치러졌다. ? 미국이 191746일에 독일에게, 그리고 1917127일에 Austro-Hungarian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나, 이 두 국가 외의 다른 독일연맹 (Central Powers) 국가들에게는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기에. 그리고, 굳이 어렵게 동부전선에 상륙하지 않아도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서유럽 (프랑스, 밸지움 등)의 해방은 독일의 항복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였으니까.

 

1917년 연말까지도 독일은 유럽, 특히 서유럽 국가들의 목숨 줄을 거의 끊어 놓은 시점에 가서야 참전한 미국의 군사력을 얕보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미국은 연합국에 대대적인 경제지원은 하였으나 선전포고를 할 때까지도 군사적 개입 준비는 아예 없었고, 군사동원이 그리 쉽사리 단기간에 이뤄지지 못한다는 것은 모두 다 아는 지식이니까. 더하여, 191412월부터 시작된 서유럽 (서부) 전선의 교착상태 (stalemate)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1917 2월 제정 (로마노흐 왕조) 러시아가 멸망한 후 세워진 러시아 정부는 요동치는 국내 사정으로 1차대전 참여에는 미온적이었으니까. 이런 이유들로, 독일은  최소 1917년 말까지는 미군 참전을 새 발의 피로 여기지 않았을까?

 

여하튼, 이렇게 시작된 미군 파병은 남북전쟁 이후 처음으로 연방정부에게 21-45세 남성의 징병제 (draft)실시를 인가한 법안, “The Selective Service Act”1917518일에 연방국회에서 통과되었고, 이에 힘입어1918년 봄부터는 하루에 10,000명의 신병을 서유럽에 파병하게 된다. 그리하여, 미국은  1년 조금 넘는 기간에 4백만 명 이상을 징집하고, 훈련을 거쳐 전투 준비 완료 (combat-ready)’ 병력을 만들었고 그 중 3백만에 가까운 장병들을 서유럽 전선에 투입하였다. 이 중에는, 일리노이 주 출신 장병 300,000명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380,000명의 흑인, 13,000명의 해군 여성 장병이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신병 훈련에 시카고의 Fort Sheridan, Great Lakes Naval Training StationMunicipal Pier (현재의 네이비 피어)가 아주 큰 몫을 담당했다.   

 

파죽지세로 늘어나는 듯한 미군의 파병에 놀란 (?) 독일, 하루라도 빨리 러시아와 서부전선으로 분산된 군사력을 서부전선에만 올인할 전략을 강구한다. , 191711월에 볼셰비키 혁명으로 세워진 러시아와 평화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1차대전 철군을 끌어내는 것. 드디어, 191833, 러시아와 평화조약을 맺은 독일은, 북부 프랑스 (Arras, France)에 위치한 40마일에 이르는 연합군 전선에1918 321 새벽 435, 장장5시간에 걸친 포격으로 선제공격작전 (offensive)을 개시한다. 이 작전 개시 후 첫 5시간에 독일이 쏟아 부은 포화가 1,160,000 , 상상을 초월하는 포격이다. 그러나, 독일은 이 작전의 궁극적  목표였던 Arras & Amiens의 운하 점령에는 실패하면서 45일에 Amiens 근교에서 1차대전의  서부전선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진다. 1918321일부터 45일까지 2주 간, 독일은 영국군 26개 사단과 프랑스군24개 사단에 맞서  74개 사단 병력과 6,600 기관총, 3,500 참호용 박격포 (mortar)326 전투기를 투입하였으나 승기를 잡지 못하였다. 2주 동안에 독일군 250,000명과 영국군 177,739명이 전사하였다. 교착상태를 뒤집을 독일의 선제공격이1918 521일부터 다시 시작되었으나 실패한다. ? 미국의 군사보급으로 재충전한 연합군에 비하면 독일의 군사력은 이미 열세가 되었으니까.    

 

이로부터 6개월 후인 19181111, 1차세계대전은 독일의 항복으로 종전된다. 어떻게? 독일의 공격작전 실패로 다시 교착상태로 빠진 지 3개월만인 1918 88, 영국군이 Amiens근교의 독일군을 기습 공격한 ‘Amiens 전투를 시작으로 연합군의 “100일 공격 작전 (the Hundred Days Offensive)”이 계속되어서. 100일 작전에는 영국, 미국, 캐나다가 참여했는데, 특히 1918926일부터 1111, 종전 직전까지 한달 반 동안 벌린Meuse-Argonne 전투에서 미군의 피해가 아주 극심했다. 백만 명 이상이 참여한 이 전투에서 미군26.000명이 사망 (1차대전 중 미군 총 사망자의 22%), 120,000(거의 60%1차대전 부상자)이 부상을 입었다. 미국의 전쟁 역사상 희생이 가장 극심했던 전투이다. 물론, 100일 전투를 통해 독일은 전투 의지나 전쟁 물자가 탈탈 털려 재기 불능 상태가 되어 무조건 항복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1차세계대전 연합국 승리의 일등 공신은 뭐니뭐니 해도 미국의 참전이라 평가한다.  미국의 참전이 독일이 지쳐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미국이 1념 남짓한 기간에 이룬 전쟁 승리를 위한 준비 완료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필자는, 이는 연방정부 주도 하에 온 국민을 체계적으로 동원하였고, 경제 체재를 조직적으로 빠르게 전시 체재로 변환하였기에 이룬 쾌거라고 본다. 미국역사에 온 나라가 이리도 일사불란하게 전쟁 승리라는 대의에 몰빵했던 경우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차 세계대전 발발 거의 3년이 되도록 연방정부는 경제지원은 열심히 하면서도 전투는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전쟁 참전 준비는 나 몰라라했는데,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곧장 전쟁 승리에 몰빵하는 수많은 (임시) 연방정부 기관을 만든다. 예를 들어, US Food Administration, The National War Labor Board, War Committee on Labor, 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 (일명 Creel Committee) 등 등. 이들 기관들 중에서 두 기관만 간단히 살피자.  

 

첫째, 1917810일 행정명령(executive order) 2679로 세워진 US Food Administration. 미국의 1차세계대전 참전 기간  대중이 어떻게 미국 내 식품의 생산, 분배와 절약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자발적인 노력이 애국심과 충성심의 발로이고 미국의 1차대전 승리를 도울 수 있는지를 여러 매체를 통해 전 국민에게 부각시켰다. 그리하여, 개인 집 뒷 마당은 물론 도심 한 가운데 공원에서 채소를 재배하는  Victory Garden 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다. 이때 Food Administration을 아주 참신하게 효율적으로 리드한 명성으로 1929 31대 미 대통령에 당선된 이가 허버트 후버 (Herbert Hoover)이다.  

 

둘째, 선전포고 일주일 만인 1917413, 행정명령 2594에 의해 세워진 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 (CPI). 정치 캠페인 매니저로 상대방에 대한 흑색 선전도 마다하지 않았던 George Creel 위원장의 진두지휘로 온갖 미디어와 수많은 미팅을 통해 사회 전반에 철두철미한 반-독일 사조를 주도했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친-독일 첩보(?)활동에 경각심을 높였으며, 미국에 대한 충성심, 애국심을  고양시켰다. 히틀러의 선전상 Joseph GoebbelsGeorge Creel 에게서 배우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아주 철저하게, 끊임없이 1차세계대전 참전의 정당성을 선전했다.

 

이러한 전방위적 연방정부의 개입은1910년에 만연했던Progressive Era (진취적 개혁시대)의 전문인을 등용한 소위 좋은 정부 (good government)’의 효율성 (efficiency)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동시에 이러한 social engineering의 경험이 있었기에 1920년대의 금주시대, 철저한 반-이민적인 입법과 2Ku Klux Klan 사회를 부담 없이 받아 들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쯤에서, ‘(money)’ 이야기를 해보자. 참전 기간이 2년도 안 되지만 미국의 1차대전 전쟁 수행 경비는 그 당시 화폐로 $33 billion ($33,000,000,000.00)으로 추산되었다. 1916년 미 재무부 총 수입의 42배가 되는 이 어마어마한 경비를 윌슨 행정부는 어떻게 조달했을까? 가장 먼저, 1913년 헌법수정안으로 자리매김한 연방 개인소득세 법 (Federal Income Tax)의 개인소득세율을 인상하였다. 연방 개인소득 세율은,  $2,000까지는 세금 면제,   $2,001에서 $5,000까지는 1917년에 2 퍼센트에서 191812 %로 인상되었고, $5,001부터는 부가세가 조금씩 추가되어, 수입이 백만 불이 넘으면 65% 세금이 부가되었다. 결과적으로, 부유층 22퍼센트가 연방 개인소득세 수입의 96퍼센트를 감당했다고 한다. 물론, 비지니스들에게 부과된 세금도 엄청났다. 세금인상으로 조달된 경비는 전체 경비의 22% 정도.

 

 $33billion의 전쟁 수행 경비의 64%$21billion‘Liberty Bond’라 명명한 연방정부 채권 (Bond) 판매로 충당했다. 일반 대중에게 채권 구입이 곧 애국심의 발로라고 근검절약 저축으로 채권 구입을 독려했다.  그보다도 더 치중한 것은 은행들에게 채권 보증 이자 (3.5~4.7%)보다 낮은 이자율로 개인에게 채권 구입 대출 융자를 적극 추진하였다. 은행 입장에서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겠다 싶은데, 연방정부의 채권 구입 캠페인은 전방위적이고 집요했다. 그리고도 모자란 경비는 화폐를 찍어내어 충당했다고 한다.

 

 군사활동은 19181111일 오전11시를 기해  올스톱하기로 되어 있지만, 1차대전의 마지막 전투는 독일과 캐나다군이 밸지움 (Mons, Belgium)에서19181111일 오후 늦게까지 벌린 교전으로 물론 사상자가 발생했다. 종전 소식이 전투부대에 제때에 전달되지 못해 생긴 어이없는 희생이다.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새 (bird)를 스케치하던 주인공의  뒤통수가 참호 밖으로 노출되자 날아온 적군의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기억는가? 이 역시1111일에 일어났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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