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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_이스트랜드 선박.jpg

이스트랜드 (Eastland) 선박

34.2_전복된 이스트랜드.jpg

전복된 이스트랜드 호

34.3_이스트랜드구조활동_resized.jpg34.4_Easterland구조활동_resized.jpg

이스트랜드 구조 활동

34.5_이스트랜드사망자임시영안실.jpg

이스트랜드 사망자 임시 영안실

34.6_시카고강가의이스트랜드참사기념동판.jpg

시카고 강가에 세워져 있는 이스트랜드 호 참사 기념 동판

 

                                                                  

 

 

 

<김 신 교수>

 

TV 뉴스 시청은 오래 전에 끊었지만, 아침이면 으례히 체크하던 e-news도 요즘은 자꾸 멀리하는 자신을 본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이 발발한지 두 달이 되어가면서 연일 보도되는 그 참혹상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고 있어서. 그래서 오늘은, 1차세계대전 이야기를 잠시 접고, 전쟁이 아닌 정말 어이없는 참사로 일상이 하루 아침에 무너졌던 시카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다름이 아닌, 현재까지도 오대호 항해 역사상 최대 참사로 기록되어 있는이스트랜드 전복사건.  1915724일 오전 728, 시카고 강(Chicago River)에 정박해 있던 이스트랜드 (SS Eastland)” 여객선이 전복되는 어처구니 없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 시점은, 독일이 1차세계대전의 속전속결을 위해 대서양에서  민간 여객선 Lusitania를 침몰하고, 민간인 1,198명을 희생시킨지 (191557)  3달이 채 안 되는 시점이고, 많이 알려진 호화여객선 타이타닉 침몰사건이 일어난지 33개월이 지난 시기이다.  선박 건조에만 현 시가로 8억 달러가 소요된 최고급 여객선 타이타닉 호는 처녀 항해 중이던 1912 4 15일에 빙산과 충돌한지 3시간도 채 안 된 새벽 2 20분 아일랜드 11마일 밖, 북 대서양에서 침몰되어 탑승자의 68%에 달하는 1,500명이 사망했다. 그때까지의 기술로는 모든 가능한 안전 조치를 다 갖추었다고 선전했기에 어느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항해 사고였다. 그런데, 사망자 중에 22커플이 신혼여행 중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타이타닉하면, 슬프지만 로맨틱한 순애보 항해 사고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타이타닉이 침몰되고 33개월이 지난) 1915 7 24, 시카고 강에 정박 중이던  여객선 이스트랜드 (SS Eastland)가 순식간에 전복, 침몰되어 848명이 (승객 844명과 승무원 4) 목숨을 잃은 참사가 일어났는데, 이스트랜드 참사 사망자 중에는 온 식구가 한꺼번에 변을 당해 아예 없어진 가정이 22 가구이다. 우연 치고는 참 기막힌 우연이라 생각되는데,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타이타닉과는 달리 시카고 강에 정박 중이던 이스트랜드호, 도대체 어떻게 침몰되었는지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

 

1915 7 24일은 한여름답지 않게 서늘한 기온에 보슬비가 간간히 내리는 토요일이었다.  이날 시카고 강에는 디어도어 루즈벨트 (Theodore Roosevelt),’ ‘페토스키 (Petoskey)’이스트랜드’ 3개의 오대호 관광 여객선이  시세로 (Cicero)에 소재한 웨스턴 전기회사 (Western Electric)의 호던 (Hawthorn) 공장 직원 가족들을 인디아나주 미시간시티 (Michigan City, IN) 로 데려가기 위해 정박 중이었다.  이 공장 직원들 절대 다수가 이민자들로 생계를 위해서는 하루도 휴일을 취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 떡!  회사 측에서 일일 수당은 물론3개의 여객선 대절을 포함한 모든 경비를 감당하며 일일 단체 가족 피크닉을 마련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회사의 대박 선심이었다. 아마도,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하기 위함이 아니었겠나 싶다.

 

어쨌거나, 여객선으로 미시간 시티까지 가족 피크닉이라니…. 기분이 겁나게 좋았던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가족을 대동하고 한껏 멋지게 차려 입고 나들이를 나섰다. 어찌나 기대에 차있었는지 이들은 아침 일찍 (새벽 630) 다운타운 정박장에 도착, 공장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멋진 차림의 동료들과 아주 멋져!’ 감탄의 인사를 나누면서, 곧장 시카고 강 남쪽 웨커 드라이브 (Wacker Drive), 라셀 (LaSalle)과 클락 (Clark) 스트리트 사이에 정박하고 있는 이스트랜드에 먼저 승선을 시작했다. 승선을 시작한지 40분 만인 7 10분에 이스트랜드 정원인 2,573명이 승선을 완료하였다.  정원이 2,573명이었으니 사이즈도 크고 구명보트 등 제반 시설이 잘 갖추어진 것으로 알려진 여객선으로 미시간 호수를 가로질러 타주 여행을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더할 수 없이 좋은 아침이었다.

 

승객들이 승선을 하는 내내 선박이 조금씩 흔들렸지만, 승무원 어느 누구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많은 승객들은 스산한 날씨를 피해 선박 아래층으로 내려갔으며, 일부는 평소에는 보기 힘든 시카고 강을 내려다 보기도 하고, 강 건너 시카고 경치를 즐기기 위해  갑판 위에 남아 있었다.  격해지는 듯한 배의 흔들림이 조금은 이상하다 생각한 승무원들이 조치를 취하며  항해를 시작하려고 닻을 풀려는 7 25, 전혀 예고없이  Bar’에 있던 큼지막한 냉장고가 소리를 내며 엎어지고 배는 부두 선창의 반대편인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스트랜드가 완전 전복되어 배 밑창이 하늘을 향한 시간이 그로부터 3분 후인 728분이었다고 하니,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배가 기울었던 것 같다.  미시간 호수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물살이 느리기로 유명한 시카고 강에 채 정박을 풀지 않은 선박에서 어찌 이런 참사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싶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길거리에서 이 광경을 목격하였던 증언들이 하나같이 너무 빠르게 배가 뒤집어지니 무엇을 어찌 하여야 할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배가 전복되니 어안이 벙벙, 뭘 해야 할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배가  심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지는데, 아래층에 있던 승객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놀란 승객들은 갑판으로 뛰어올라 오려고 하였을 터인데, 여기 저기 널브러져 있는 피아노, 북케이스, 테이블 같은 무거운 가구들이 가로막았을 뿐 아니라 서로 먼저 올라가려는 승객들로 인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벌어진다.  그리고는 아주 잠깐 후에 배가 뒤집어 지며 강 밑으로 가라앉으니,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을까?  갑판 위에 있던 승객들이라고 그리 안전하였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11페이지에 달하는 시카고 트리뷴 지의 보도에 의하면, 배가 왼쪽으로 기울면서 강물에 내던져진 많은 갑판 위의 승객들은 물을 흠뻑 먹은 옷의 무게로 인해 눈 깜짝할 사이에 강물 밑으로 가라 앉았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에는 무거운 옷의 무게를 견디며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흔치 않았다고도 한다.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주위의 배들이 힘을 합쳐 배를 조금 위로 돌리면서 민간 잠수부들이 뛰어들고, 그야말로 촌각을 다투는 구조 작업이 펼쳐졌다.  그 당시 시카고 언론에는 많은 영웅적인 구조 작업이 보도되어 있다. 이들 덕분에 사망자 수가 탑승객의 1/3에 못 미치는 848명에 그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망자 중에는 220명의 체코 이민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848명 사망자 모두가 곧장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던 것이 아니었다. 22가구가 온 가족이 사망했다 하니 꽤 많은 사망자들이 가족을 찾지 못해 --후에 오프라 윈프리 프로그램을 촬영한-- 하퍼 스튜디오 자리에 있던 2군단 무기고에 마련된 임시 영안실에 한참 동안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체코 이민자 220명은 플라스키 (Pulaski)와 브린마 (Bryn Mawr)에 소재한 보헤미안 내쇼날 공동묘지 (Bohemian National Cemetery 5255 N. Pulaski Rd. Chicago) 매장되었다--보헤미안은 체코인의 또 다른 명칭이다.  이 공동묘지에는 시카고에 머신 정치를 정착시켜 시장이 되었던 써맥 (Anton Cermak)의 묘실도 있지만, 유달리 ‘191572일에 사망이라는  묘비가 많아 이스트랜드 참사로 얼마나 많은 체코인들이 희생되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참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되어 참사의 규명에 들어갔던 이스트랜드 참사 조사 위원회는 이스트랜드가 너무 top-heavy였던 것이 유일한 원인이라고 자세한 설명없이 발표하였기에 24년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고, 법적 처벌도 없었다. 주로 미시간 호수를 운항하던 관광용 선박인데, 도대체 왜 어떤 이유로 top-heavy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던 채로, 군사용으로 재정비한 이스트랜드 선박을 미 해군이 구매하여 USS Wilmette으로 개명하고, 주로 해군 훈련용 선박으로 사용되었다. 그나마도, 2차세계대전 직후 USS Wilmett (이스트랜드) 은 영구 폐기 처분되었다.  24년 후에 누구에게 책임을 물었을까? 이스트랜드 선박의 소유주들이 사고 당시 이스트랜드의 수석 엔지니어였던 에릭슨 (Joseph Erickson)의 조타 실수라며 에릭슨을 기소했다. 재판 결과가 어찌 되었을까? 훨씬 후에 진화, 창조 재판인 Scopes ‘Monkey’ 로 유명해진 변호사 Clarence Darrow의 끈질긴 변론으로 에릭슨이 사실은 이스트랜드 호의 구조적 결함을 소유주들에게 알린 내부고발자 (whistle blower)였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재판은 유야무야 슬그머니 끝난다. 그리고는, 이스트랜드 참사는 기억에서 잊혀진다.   

 

그러다가, 이스트랜드 참사 80주년이 되는 1995년에 새로이 발표된 연구에 의해, 이스트랜드가 1915년에  심하게 top-heavy했던 원인이 밝혀졌다. 1912년에 타이타닉이 64개의 구명보트가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20개 밖에 정착하지 않았다는 보도를 접한 미국 국회가 탑승객 75%가 사용할 수 있는 구명보트 정착을 의무화하면서1915 7 2일 이스트랜드는14~ 15톤에 달하는 구명보트를 배 윗 편에 장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04년에도 정원을 꽉 채운 채로 오대호를 항해하다가 전복될 뻔했던 이스트랜드에서도  14~15톤의 무게가 더해졌으니 그렇게 빠른 속도로 배가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후속 조치없이 구명보트 장착만을 의무화한 연방 국회의 졸속한 입법이 원인이라는 것. 결국 참사 발생 80년 후에야, 그것도 80년 전 그 당시  연방 국회의 책임이라니…. 민주주의의 비싼 댓가였을까?

 

2014, 그러니까 이스트랜드참사 100주년이 되어가던 해에, 월스트릿 저널 (Wall Street Journal) 시카고 편집장이었던 매카시 (Mike McCarthy) , “Ashes Under Water: The SS Eastland and the Shipwreck That Shook America “ (Lyons Press)가 출판되었다. 비밀에 붙여져 묻혀 있던 기록들을 예리하고 세밀하게 분석하여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 책의 요점은, 이스트랜드 참사는 우연한 사고 (accident)가 아니고 20세기 최대의 부당, 불법 (injustice) 중의 하나였다는 것.  왜냐하면, 1915년의 사고  훨씬 이전부터 이스트랜드의 구조적 결함에 대해 내부 고발자들의 여러 번의 경고가 있었는데도, 단기적인  이윤 추구에만 올인한 소유주들은 구조적 결함을 전혀 고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사관들  (inspectors)에게 뇌물 공세를 펼치며 검사 무사 통과를 지속했기에 1915724일의 시카고 강에서의 이스트랜드 참사는 자본주들의 ‘money, 그것도 단기 이윤 추구를 공권력이 눈 감아주어 노동자들이 희생 당하게 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왠 불공정 (Injustice)이냐고? 정부가 책임을 다 하지 않았기에. 참사 당시에도 쉽게 알 수 있었던 내부 고발자와 뇌물 수수 기록을 100년 가까이 비밀에 묻어 두었다니,  이럴 수가?

 

과연 21세기 현재에는 어떨까?”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 이 책으로 인해, 필자는 시카고 강 사고 지점에 세워져 있는 이스트랜드 참사 기념 동판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였었다.

  • ?
    skyvoice 2022.04.24 14:54
    한국의 세월호 사건을 연상하게 하는 이런 참사가 100년도 넘은 시카고에서 벌어졌다니. 그리고 그 수사가 80년만에 다시 이루어져 종결되었다니,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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