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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을 사이에 두고 두 캠프로 나뉜 1914년의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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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at War (The Chicago Daily Tribune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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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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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가스 마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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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의 유럽 (1차 세계대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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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의 유럽 (1차 세계 대전 이후)

 

 

 

<김 신 교수>

 

전 인류는, 국가 간의 전쟁이란 종식될 수 없고 거듭할 수록 전쟁의 양상과 피해가 끔찍해진다는 것을 20세기 전반에 있었던1(1914.7.28-1918.11.11)2(1939.9.1-1945.8.15) 세계 대전을 통해 뼈저리게 겪었는데, 그중1차 세계 대전 이야기를 오늘부터 시작한다. 1차 세계 대전은 전쟁 역사 상 최초로 지상 (land), 해상 (Sea  & under the sea)과 공중 (Sky)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졌고 참호 (Trench), 유독가스, 수류탄, 기관총 (machine gun), 탱크, 잠수함, 어뢰와 폭격기 등 새로운 무기들을 사용하여 전쟁터에서 사망한 군인이 최소 천만 (10 million), 부상 군인은 2천만이라는 전무후무한 대 살육 전쟁이었다. 물론, 민간인 피해는 부지기수.  알 수도, 예상할 수도 없어 아직도 기록문서들의 예상치가 제 각각이다.

 

그래서인지, 1차 세계 대전은 (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대 전쟁 (the Great War)” 또는 전쟁 영구 종식을 위한 전쟁 (the War to End War)”이라 불렸다. 일차 세계 대전 (The First World War)1914728일에 시작하여19181111일까지 주로 유럽에서 치러진 전쟁이다.  그래서, 그 당시 미국에서는 유럽 전쟁 (the European War)”으로만 치부했다. 또한, 일차 세계 대전은 처음 얼마간은 발칸(Balkan)전쟁으로 불렸고, 곧 이어 유럽 전쟁으로, 그리고 세계 대전’, 또는 대전쟁이 된 전쟁이다. 그만큼, 이 전쟁의 발발 경위나 과정이 아주 복잡미묘하여,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새로운 저술이 끊이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일차대전 종전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Austria-Hungary, the Habsburg Empire), 러시아 (Russian), 오토만(Ottoman, Turkey) 과 독일 제국이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지고 국가 경계선이 완전 재배치되어 서구 세계의 지정학적 판도를 드라마틱하게 바꾸어 놓았다. 또한, 이 전쟁으로 유럽이 유일한  문명 사회라고 자부하던 백인들의 사고가 뿌리 채 흔들리기도 했다.   

 

우선, 일차세계대전의 발발 경위를 간단히 살펴보자. 1914 6 28,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Sarajevo)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Austria-Hungary)의 후계자 페르디난드 대공작 (Archduke Franz Ferdinand) 부부가 한 세르비아 비밀결사대원 (the Young Bosnians)의 총격으로 암살된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베를린조약 (1878)에 의거하여 보스니아 지역 완전 통합을 끝냈었기에 페르디난드 대공작 부부의 발칸 방문이 이뤄졌던 것인데, 예상 외의 암살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즉각 세르비아에게 책임을 물었고, 한 달 간의  ‘7월의 위기’ (the July Crisis)라고 불리는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와 프랑스 간에 외교적 줄다리기를 거치는데, 이때의 각 국은 전쟁은 하고 싶지 않으나, 명분 때문에 어쩔 수 없게 전쟁으로 치닫는과정이 흥미(?)롭다. [**, 7월의 외교적 줄다리기가 1차대전이 된 과정에 관심이 있으시면 Barbara W. TuchmanThe Guns of August” 일독을 강추한다]  드디어, 7 28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하여, 발칸 전쟁이 시작되었다. 곧 이어, 독일을 시작으로 유럽의 크고 작은 아주 많은 나라들이 --1878년부터 지속된 유럽 국가들 간의 상호 협약/조약에 의해-- 참전하며 유럽 전쟁으로, 그리고 일본, 캐나다와 미국의 참전으로 명실공히 세계 대전이 되었다.

 

단적으로, 1차 세계 대전은, the Central Powers (독일 연맹)the Allies (연합국) 간의 전쟁이었다독일 연맹에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토만 제국이 중심이었고, 연합국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중심으로 캐나다, 미국과 일본이 함께 하였다앞으로 몇 번에 걸쳐1차 세계대전이 미국과 시카고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계획인데, 오늘은 미국의 참전이 지연된 경위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겠다.

 

먼저, 1880-1920년의 미국은 국제,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급격히 바뀌는 체재로 인해 새로운 해법을 찾아 요동치던 시기인데, 일차 대전 발발 이전까지  미국은:  (1) 사회진화론과 몬로 독트린에 기반을 두고 일으킨 스페니시-아메리칸 전쟁 (1898)의 승리로, 국제적 강대국이 되어갔고 (미제국주의), (2) 빠른 산업화, 근대화, 도시화와 그에 따른 사회적 문제가 크게 불거졌고, (3) 그러한 와중에도/남 유럽 이민과 중부(central) 유럽과 러시아에서의 유대인 이민이 아주 큰 증가를 지속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미국은, 1914 7 28, 전쟁 발발 불과 며칠 후인 8 4일에 중립을 선포한다. 그리고 3년 동안 영국의 끈질긴 참전 요구에 불응한다. 이 시기는, Scot-Irish 로서 전형적인 Pro-영국 과 Anti-독일 성향의 윌슨 (Woodrow Wilson) 28대 대통령 재임 기간이어서 3년동안 미국의 참전이 지연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그 실마리를 필자는 1912년 윌슨 캠페인의 플랫폼에서 찾았는데, 거기에는 곧 닥칠 1차 세계대전이나 국제 정치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언젠가 윌슨이 실수로 고백한대로, 그는 오로지, ‘제퍼슨의 모토인 미국의 경제 발전을 해밀턴 식 방법 (강력한 연방정부의 개입)’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이리라.

 

그래서일까? 미국은 공식적 중립 선포가 무색할 정도로 전쟁 초기부터 연합국, 특히 영국의 전쟁 지원에 공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나선다전쟁 지원은 열심히 하지만 파병은 하지 않는다면, 전쟁 물자의  생산으로 생겨나는 경제적 이득은 웰컴이지만 사상자가 생기는 것은 노 탱큐,’  , ‘꿩 먹고 알도 먹는 것아닌가? 하여, 이기적인 미국 정책으로 간주될 수 있으나, 그 당시 미국 내에서의 반-독일무드는 대통령을 위시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아주 노골적이고 강했다. 그럼 왜? 미국이 사회 전반에 만연한 노골적인 반-독일 무드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견지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 연유는 미국의 최대 인종 그룹인 독일계 미국인들 때문이다. 전국의 독일계 미국인들은 워싱톤 정가에 대표단을 조직해 보내어 미국보다 월등히 우수한 독일의 학문, 예술, 군사 경제력을 지적하면서 아주 조직적으로 전쟁 참전 반대 로비활동을 하였다이면에서, 이민의 나라 미국에서도 가장 이민의 도시인 시카고가 덜 할 수는 없었겠다.

 

1914년의 시카고 인구는 2,437,526명인데, 이중에 미국태생 인구 (the native-born) 31 % 752,111명이고, 외국 출신 인구 (the foreign-stock) 1,685,415명으로 69 %이다. 이 중에, 독일 출신이 399,977, 오스트리아 출신은 58,848명이다. 그러니까, 일백칠십만에 가까운 외국 출신 시카고 주민 중에 27%가 독일 계통이었다. 그때까지 미정부는 이민 3세부터 미국태생(native-born)에 포함시켰으니, 여기에 독일이민 3세까지 포함하면 독일계통의 수적 우세는 확실했다. 시카고 초창기부터 정착하여 1914년에는 이민 5세까지 있었던 시카고의 독일 커뮤니티는 1880년대 부터 밀려온 동/남유럽과 러시아 유대인 이민에도 불구하고, 시카고 최대 인종 그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아주 많은 독일 학교를 운영하였고 공립 학교의 커리큘럼에 독일어를 포함시켰으며, 시카고 오케스트라 등의 여러 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였고, 각종 페스티벌과 이벤트를 통해 우월한 독일 문화를 시카고 사회에 전파하였다. 시카고의 독일계들 중 일부는 독일군으로 전쟁에 참전했지만 대다수는 미국의 참전 반대 캠페인에 힘을 실어 주었다.

 

시카고의 독일연맹 (the Central Powers) 그룹에 독일 계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랜 기간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던 역사로 인해 영국에 대한 혐오 감정이 깊었던 15만명 가량의 시카고의 아이랜드계가 독일 연맹그룹에 합류했다. 이들 대다수는 친-독일이 아니고 반-영국으로 독일 연맹에 힘을 실어 주었다.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독일계와 정치/종교적으로 강력한 아이리시가 손을 잡으니, 시카고의 전쟁 개입 반대 그룹 (the Central Powers)은 그야말로 파워풀했다. 숫자적으로나 파워로나 막강한 독일 연맹 그룹이지만, 전쟁이 심각해지면 질수록 커져가는 일반 사회의 반-독일 무드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시카고에서 독일 퍼레이드는 물론, 공립 학교의 독일어 과목이 폐지되었고 독일인은 원수라는 팻말이 공원마다 세워졌으며, 음식, 거리, 클럽 이름에서 독일식 냄새를 없애는 수모도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링컨팍에 있던 괴테 흉상이 파손을 염려하여 창고에 보관될 정도였다. 자연히, 자신이 독일계임을 감추는 사람들이 급증하였고, 미국과 시카고에서 독일계의 숫자가 절반으로 뚝 떨어졌고, 그 많던 독일 학교는 자취를 감추었다. 1차 세계 대전을 통해 독일계통은 가장 선호하던 인종 그룹에서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다.

 

독일은, 19154 22일 프랑스와 캐나다 군인들의 참호에 유독가스를 살포하기 시작했고, 5 7일에는 민간승객선 Lusitania를 독일 잠수함에서 발포한 어뢰로 침몰시켜 1,198명의 민간인 (미국인128)을 희생시켰으며,  531일에는 독일 비행기가 런던 공습을 시작하는 등, 그때까지의 전쟁 관습과 상상을 깨는 육//공군을 총동원한 전방위적 공격으로 연합국을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유럽이 독일 연맹에 넘어가면 미국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 의식은 고조되지만, 그래도 미국의 참전은 강력한 독일계 미국인들의 반전 로비로 인해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 (Heinrich von Eckhart)에게 멕시코 정부에게 전달하라며 1917119일에 독일 외무상 짐머만(Arthur Zimmerman) 이 보낸 비밀 전보가 미국 정부에 포착되어 31일에 전격 공개된다. 문제의 짐머만 전문의 골자는독일이 1917 21일에 유럽 전선에서 무제한 잠수함 공격 작전을 개시할 예정인데,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해 줄 것, 그리고, 만약을 위해 멕시코에게 동맹 제안을 할 것. , 멕시코가 독일과 동맹을 맺으면 1848년 전쟁에서 멕시코가 미국에 빼앗겼던 영토 (텍사스, 캘리포니아, 등등)를 되돌려 받을 수 있게 적극 협조하고 후원을 하겠다는 것이다이 중 어느 것이 미국 정부를 참전으로 몰아갔을까?  훗날 공개된 비밀문서에 의하면 미국 정부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 작전으로 위축될 대외 무역을 더 염려하였다 한다. 과연 미국!

 

 

미국은 드디어 1917 4 6일에 독일 연맹에 선전 포고하고, 그해 626일에 14,000명의 보병을 프랑스에 상륙시키며, 1차 세계대전 미군 파병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보병 부대의 목적은 프랑스의 서부 전선에 미군 캠프를 세우는 것이어서 미군의 실제 전투 참여는 1917 1021일에야 시작된다. 독일 연맹이 19181111일에 항복하였으니, 미국의 1차 세계 대전 참전은 길어야17개월, 실질적으로는 12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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