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삼 교수 / 백석대학교>
사고 직전 4시간 전부터, 그러니까 최초로 신고가 들어온 오후 6시 30분부터 무려 11차례나 신고가 들어갔다. ‘압사 당하고 있다’는 표현을 포함해서, ‘압사’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들린다. ‘대형사고 날 것 같다’며 불길함을 감지한 신고자도 있었고, “골목 입구를 막아서, 들어오는 인원을 통제해달라”고 직접 방법을 제시하는 시민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방치되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어야 하는가. 안타깝다. 또 어영부영 덮어버릴 것 같고, 그래서,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찾아올까 두렵다. 작은 경고음을 무시하는 것은, 사회나 개인이나, 교회나 세상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숙고되지 않은 고난은 반복된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보호받지 못한 청년들의 짧은 삶에, 가슴이 미어진다. 시민 한 사람의 목숨이 권력자 열 명의 목숨보다 중해야,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다. 지극히 작은, 그것도 죽어도 할 말 없는 죄인 하나를 위하여, 하늘 보좌에 앉으신 심판주 하나님이 죄 없는 자신의 친아들을 대신 내어주셨다.
성경의 가르침을 수호한다고 확신하는 설교자들은 단에서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주일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라고 스스로 고백하며 기도하는 이들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제자들에게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라시던 주님의 통치 방식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권력의 본질이 섬김인 나라이다. 단지 높아서 좋고, 힘이 있어서 우러르는 권력이 아니라, 섬김의 목적에 봉사하지 않는 권력은 심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 중 지극히 작은 자가 짓밟힐 때,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될 때, 권력자들의 안위가, 자식을 잃고 슬피 우는 어미의 마음보다 더 중요할 때, 죄 많은 당신과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아들의 복음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십자가는 목에 거는 목걸이요, 성경 구절은 돼지 목에 두른 진주가 된다.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어미의 울음, 백성의 비참을 두고 애곡하는 라헬의 통곡을 들으라. 권력이 섬김에 종노릇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그 아들이 다시 오실 때까지, 권력을 남용한 거짓되고 살찐 목자들이 심판받을 때까지, 애통하는 자는 애통할 것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계속 주리고 목마를 것이다. 그 애통 속에, 그 주림과 목마름 속에 아버지와 그 아들의 나라가 있으니, 지금은 슬픈, 잃어버린 땅에서 흘리는 눈물로 가득한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