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신 권사 / 청운교회>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왔다.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계절의 변화를 더 가까이 느끼는 게 농촌이다. 더위와 장마를 반복하던 여름은 훌쩍 지나 어느덧 한 계절 끝에 서 있다. 시골에서는 벌써 김장 배추 모종을 할 때가 되었다고 한다. 아직 여름이 다 가지 않았는데 농촌에서는 벌써 가을을 준비하는 것이다. 요즘은 개인이 배추씨앗을 뿌리지 않고 김장 배추 모종을 농협에서 각 가정마다 지급하고 있었다. 너댓잎 여린 잎이 달린 배추 모종이 심어진 모판을 받아든 아버지는 텃밭에 갈아놓은 밭고랑에 조심스레 심으신다. 백세를 바라보시는 연세에 농사를 짓는 것도 힘들고 혼자 잡숫는 것이 얼마 되지 않으니 잡수실 만큼 김치를 해다 드릴테니 김장 거리를 심지 마시라고 자식들이 당부를 했건만 아버지는 여전히 때가 되면 심고 일구신다.
아버지의 또 하나의 삶의 과제가 시작되었다. 모종을 심고 물을 주고 벌레를 잡고 거름을 주고 아침 저녁 들여다 보시면서 또 한 계절을 보내실 것이다. 여리디 여린 잎이 자라 배추속이 꽉꽉 차 오르고 묵직해져 가며 김장철이 되는 어느날 “또 언제 김장하러 올거냐” 하시면서 자식들을 기다리실 것이다.
여린 모종을 밭에 구멍을 파고 물을 주고 뿌리를 흙에 묻고 덮어 또 물을 주었건만 햇빛에 금방 시들해진다. 아버지는 호박잎을 따다 한 포기, 한 포기마다 덮어주고 호박잎이 바람에 날아갈까봐 흙도 한줌 얹어 놓는다. 호박잎이 모자른데는 칡 넝쿨을 베어다가 칡 이파리로 덮으셨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고깔모자를 쓴 배추가 귀엽고, 한 잎 한 잎 덮고 있는 아버지 모습이 진지해 보인다. 얼마나 성실한 모습인가. 흙을 사랑하는 착한 농부, 우리 아버지를 연세가 드셨다고 고만 일 손을 놓으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편협된 생각이다. 나이와 상관 없이 일평생 해오신 일을 묵묵히 하시면서 정년도 끝도 없이 주어진 순간 순간을 살아오시는 아버지가 새삼 더 존경스러웠다.
배추 고랑 옆에는 쪽파가 뾰족뾰족 나오기 시작하고 무순도 떡잎이 나와 잘 자라고 있다. 아버지는 김장에 넣어야할 양념을 여기 저기 심고 챙기면서 김장을 하시고 또 봄을 기다리실 것이다.
우리의 고향, 안골 마을에서는 오늘도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있고 귀하고 풍요로운 아버지의 식탁이 작은 텃밭에서 차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