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호 목사 / 포항제일교회>
포스터 모던은 거대 내러티브를 향한 불신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불신과 회의는 필요하다.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야 한다. 그러나 불신과 전면거부는 구별되어야 한다. 적절한 검증 후에, 부분적, 잠정적 수용도 필요할 것이다. 포스트 모던 상대주의 시대에 한 쪽에서는 ‘빅 히스토리’가 고개를 드는 것, 한 두개의 개념으로 인류 혹은 자연 역사 전체를 이어 보려고 하는 (대체로 어설픈) 시도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가 있다. 제도권 지식인들이 거대담론을 탐내지 않는다고 겸손을 떨고 있는 사이, 이터널스 류의 영화들이 그 방향으로 막 내지르고 있다.
모든 메타내러티브를 거부한다면 포스트 모던 안에 혹 숨겨진 내러티브가 있지는 않은지 “불신”의 눈으로 살펴 보아야 한다.
불신을 부추키는 이들도 불신해야 하지 않겠는가?
리처드 보컴의 말이다: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이런 불신은 현대 서구사회에서 어떤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오히려 그런 불신이 아주 강력한 후기 근대사회의 거대내러티브이자 포스터모던 다원주의를 포섭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소비주의적 개인주의와 자유시장의 세계화로부터 시선을 앗아갈 수도 있다. 그것은 소비주의 생활양식의 다양한 선택을 장려한다는 점에서 해방을 주는 것 같지만, 훨씬 실제적인 의미에서 보면 오히려 억압적이다. 왜냐하면 ‘부익부 빈익빈’을 촉진하고 환경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유창한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이런 실상을 쉽게 무시하곤 한다.
그런 생활양식은 진보를 앞세운 근대의 메타내러티브들이 늘 정당화했던 것과 같은 억압을 이어 간다. 많은 포스트모던 이론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런 메타내러티브와 결탁했다는 혐의를 벗기 힘들다. 포스트모던 상대주의늰 이런 메타태러티브에 확실히 맞설 만한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며, 소위 경제현실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이 메타내러티브의 틀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결코 다양성의 위협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히려 메타내러티브의 종언을 선언하는 포스트모던 이야기보다 다시금 보편적 가치들을 강조하면서도 지배 세력이 이런 가치들을 자기 것으로 삼는데 맞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 리처드 보컴, “성경을 일관된 이야기로 읽기” 『성경 읽기는 예술이다』 중.
포스트 모던의 숨은 내러티브에 대한 얘기를 하였으니,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우영우”를 예로 이야기보고자 한다. "우영우"를 드문 드문 보아서 한 마디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드라마의 명시적 주제는 장애, 이 드라마를 잘 보고 소화하면 장애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를 내걸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정신능력이 탁월한 자폐는 극소수라는 등의 반론이 많다. 이런 반론에 공감이 가는 이유는, 장애인들의 현실 뿐 아니라 이 드라마가 깔고 있는 숨은 내러티브 “성공주의, 능력주의”에 대한 반감때문일 것이다.
일류대학 법대에서 일등을 독차지하던 능력자가 현실에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은 높이 사지만,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훨씬 더 많은 장애현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다양성이라는 면, 동성애 코드, 기독교에 대한 비아냥 등은 이제 워낙 많이 등장해서 새롭지 않은, 힘주어 주장할 필요도 없는 대세가 되어 버린 현실을 이 드라마는 일깨워 준다.
성공주의를 깔고 있으면서도, 대중의 공감을 얻어낸 영리한 드라마이다.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 부었다는 고래 장면은 이 드라마가 판타지임을 은연 중에 알려 주는 효과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본다.
고래 못지 않게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김밥이라는 설정! 어디 만만한 데가 있어야 동일시라는 것을 할 수 있을텐데, 자폐는 만만하지만 능력은 넘사벽이니, 너무 먼 당신이 될 수 있는 주인공을 친숙한 음식, 김밥이 확 당겨 온다. 이 드라마와 김밥집 매출의 상관관계를 조사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