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신 교수>
오는 3월 4일 금요일, 전세계 180여개국에서 모일 135주년 세계 기도일의 본문은 예레미야 29장 11절이다. (역사적인 연유로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잉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의 기독 여성들이 작성한 기도문의 주제는 11절의 한 부분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노니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이다. 예레미야 29장은 1차 포로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던 예루살렘의 기름종이들-여고니야 (여호야긴) 왕과 국모 (여호야긴의 어머니), 환관들,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 은장이와 대장장이들과 장로들, 사제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온 백성--에게 보낸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예레미야의 편지이다. 당연히, 4절부터 시작되는 본문의 ‘나(내)/I’와 ‘나의/the plan I have’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렘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JPS Tanakh 번역: For I am mindful of the plans I have made concerning you- declares the Lord- plans for your welfare, not for disaster, to give you a hopeful future). 그러면서, 포로로 끌려간 그곳의 평안을 빌고, 그 곳에서 집 짓고 과수원을 새로 마련하고 그 소산을 양식으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기르고, 그 자녀들로 하여금 또 가정을 이뤄 살게 하라 하신다. 한 마디로, “번성하고 쇠잔하지 말라 (Multiply there, do not decrease)”는 당부이다.
이제 막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시작한 유다의 기름종이들에게 이 여호와의 당부는 위로가 되었을까? 아니, 귀에 들리기는 했을까? 아! 10절에, ‘70년 포로생활’이 끝나고 본국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여호와의 약속이 있는데 왜 듣지도, 믿지도 못하나? 70년? 너무 너무 길다. 끔찍한 포로생활을 70년이나 계속하라고? 난 포로로 이생을 마감할 것이 분명하고, 내 자식도 포로 생활을 하지는 않았을까? 국가 간의 전쟁은 각 나라가 믿는 신들 (유다는 야훼 하나님; 바빌론은 마르둑)의 전쟁이라 믿었던 그 시대에, 유다 포로들이 바벨론 성문의 장대한 이슈타르 문을 보고 그 문을 통과하면서 겪었을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실망과 좌절, 무력감과 절망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컸는데…. 이것 --내가 믿었던 여호와 하나님은 마르둑에게 완패하셨어. 끝장이야--이 재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장래의 소망? 70년이 꽉 차야만 돌려보낸다는 약속? 그리고 주시겠다는 평안?
코로나19, 이제 3년차인데 매일 새벽마다 ‘힘들어요. 코비드19 끝내주세요’ 매달리는 오늘의 우리. 예레미야 편지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의 그들의 심정, 아니, 그 편지를 받고 난 후에도 오랜 기간 지속된 그들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아렴풋이나마 느껴보려고 베르디 (Giuseppe Verdi)의 오페라, “나부코(Nabucco)”—이탈리아어로 느부갓네살이 ‘나부코도노소르’--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어보았다. 그리고, 시편 137편을 읽었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 걸어놓고서,
우리를 잡아온 그 사람들이 그 곳에서 노래하라 청하였지만,
우리를 끌어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 가락 시온 노래 불러라,”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 (시137:1-4 공동번역)
특히, 2절, “우리의 수금을 언덕 나무 가지에 걸어 놓았다”, 이 말씀이 가슴을 친다. 왜냐하면, 이 히브리 본문은 ‘나뭇가지에 임시로 걸어 놓았다’ 보다는 ‘다시는 쓸 수 없게 나무에 처형했다’는 뉘앙스를 주었기에. 미국 흑인 노예들이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노예 막사에서 모여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흑인 영가들이 그 생활을 견뎌내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포로생활에 유일한 위로를 주는 수금을 부수어 없애더라도, 남의 나라에서 낯선 땅의 사람들에게 야훼의 노래를 들려주지 않겠다 한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리고 시편 137편을 끝내는 8, 9절은 머리가 삐쭉 설 정도로 섬뜩하다.
“나에게 쫓겨 사로잡혀가 사는 그 나라가 잘되도록 힘쓰며 잘되기를 나에게 빌어라. 그 나라가 잘되어야 너희도 잘될 것이다” (공동번역 렘29:7)고 하신 여호와의 말씀이 이들의 귀에 들리긴 했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포로가 되게 하셨다고요?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이스라엘의 신’이 아니라고 했을까? 시편137편 5-6절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럼 무엇이 이들의 들을 귀를 막았을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할까? 아니, 하나님에 관해서도 내가 원하는 것, 듣고 싶은 것만 듣게 하는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나 (우리)에 대한 마음--하나님의 생각--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마가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시작한다. 신구약중간사 --예: 마카비 전쟁--를 심도 있게 공부한 후이어서인지 ‘호산나!’ 환호하는 무리의 소리가 (예전처럼) 순수하게 들리지 않는다. 예수를 (신성모독이 아니라) 로마에 대한 반란죄로 엮어 빌라도 총독으로 하여금 처형시키려는 산혜드린의 계략 같아서. 차치하고, 예수가 저주했던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고 놀라는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어라.” (22절) 이 번역은 자칫 잘못하면 무조건 “하나님, 믿~씁니다”로 끝나게 한다. 그렇게 끝나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 우선,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지 내가 “믿씁니다”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둘째로, 하나님께 믿음의 은혜를 주십사 하려면 그 하나님을 알아야 하니까. 그런데, 나 (우리)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곧 바른 믿음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신 성경 말씀을 부단히 묵상하며, 질문하며,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 너머의 하나님의 진면목을 알아가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11장 22절은 ‘하나님의 믿음을 가져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우리 (유다 포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믿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플랜)은 무엇일까? 창세기 1장 28절-2장 3절의 말씀,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평안과 안식이리라. 우리에게 평안과 안식을 주기 위해, 하나님은 세상에서 마르둑에게 패배했다는 조롱을 받고, 자신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수모도 감내하신다 싶다. “70년의 포로생활, 힘든 것 다 알아. 그렇지만, 절망하여 생을 저버리지 말어. 70년 인내의 끝은 너와 너의 자손에게 평안이요 안식이니까. 너는 할 수 있어. 나의 형상으로 돌아올 수 있어. 역사의 주관자인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니 두려워 말아!”라고 하신다. 마침내 70년이 차서 고레스 왕이 귀환을 인가했을 때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바빌론에 남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우리는 나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 (생각)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살려주세요’라고 기도만 하고 있다. 혹시라도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주시는 --베드로로 하여금 정신 번쩍 들게 했던-- ‘꼬끼오’ 닭 울음 소리가 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우리 (나)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 (생각)을 붙잡고 살아가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