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호>
벌써 계사년도 한해 끝자락에 와 서있다.
참 세월이 빠르기도 하다. 초로인생이니 세월은 화살과 같다느니, 세상은 잠시 잠깐 쉬었다가 가는 길이라느니 하는 말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새 세월은 사정없이 달려 인생을 정리하는 나이에 이르니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젊어서는 겁도 없이 살아보지도 않고 다 안다는 듯 오만하고 어설픈 자신감으로 청춘을 보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삶이란 하얀 종이위에 색을 골라 칠하며 세상이 나눠놓은 조각들을 정해진 기한내에 짜 맞추는 퍼즐처럼 내 뜻과 상관없이 인생은 어차피 신의 손바닥 안에 든 것으로 생각했다.
열정도 도전의식도 없이 젊음의 푸르른 모통이를 평퍼짐하게 돌아 나온 다음에야 비로서 나는 불가해한 생이 얼마나 무수한 함정과 다양한 경쟁이 숨어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가슴 두드리며 정신을 바로 했다.
뒤늦은 호기심과 관심이 세상을 향해 꿈틀되자 뒷걸음질 치던 내게도 한줌의 광기와 시답지 않은 열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세상을 향해 달려 갈 때는 인생이 치열한 경쟁속 각축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 인생의 시계바늘이 삶의 영마루를 한참이나 지나쳐 온 다음에야 우리 가족은 꿈을 향해 태평양을 건너 낮선 땅으로 이주를 하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 적재된 에너지가 탕진될 때까지 혼신의 삶을 사는 것이 이민생활로 착각을 했다.
일에 지쳐서 소진하는 삶을 이어 갈 때쯤 내 자신을 찾고 싶어 생각을 다질 때, 내게 희망을 준 것은 신문사의 문학공모전이었다.
삶을 통해 숨을 쉬고 있는 생명이라는 명분으로 이 땅에 던져진 존재의 책무를 감당하기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라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일만하고 사는 것이 최선의 길이 아님을 느끼고, 왜 진작 삶을 통한 일과 행복, 그리고 희망과 꿈이 있다는 걸 늦게야 깨달았을까.
어느 날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보도블록 틈새에서 피어오른 작은 풀꽃을 보고, 삶이 위대하게 질기고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에게도 경이로운 삶이 있고 그것이 행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서 일속에 묻혀 사는 삶이 지루해 호기를 부리고 신문에 광고 난 단편소설공모전에 글을 써 보냈을 때를 잊지 못한다. 학창시절 '시'로 등단한 추억이 있어 다시 모험을 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스스로 삶의 자존감을 찾기 위해 용기를 내어 도전을 했다.
1979년 시카고에선 원고지를 구할 수 없어 일반 노트북을 뜯어 200자 원고지를 만들어 오랜만에 연필을 손에 쥐고 글을 써 내려갔던 작업은 감개무량하여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마감 전날 밤을 새워가며 쓴 소설은 마감날 우편소인을 찍어 보낸 후 일 속에 잊고 있었다. 잊고 있던 얼마 후 당선이 되었다는 통지서가 집으로 배달되었고 상금 백만원이 손에 쥐어질 때는 경이로운 소식과 함께 삶의 변화였다.
일속에 묻혀사는 삶이 지루해 인생을 축제처럼 살고 싶은 충동으로 도전을 해 본 것인데 역시 인생은 모험에서 터닝포인트 할 수 있는 시작이 되었고 꿈을 꾸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순간 자기 모습 그대로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라 했다. 무엇이 되고자 해서 허명이라도 얻고자 해서 글을 쓴 것은 아니었다. 인생을 지루하지 않게 내가 추는 시간의 춤으로 허무에 대항하는 내 삶의 양식이었다. 쓴다는 것은 시간과 동행하고 잊어져 가는 것들과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건져 올리는 영혼의 행위로 내 삶의 생활을 표현하고 싶었다.
내가 살아왔던 시간들, 그리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못해 안타까운 지나간 시간들, 그래서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 속에 후회의 시간들은 다 내려 놓으려 한다. 우리는 지금 힘들었던 시간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들만 가슴에 담고 새해를 맞이해야 한다.
희망과 소망, 꿈을 다시 꾸며 도약의 해를 맞이하는 것은 우리가 '살았있다'라는 기쁨이요 증거이며 어떤 경우에도 삶의 가치는 위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해의 삶 자체는 축복이고 감사함이다. 가족과 친구, 이웃이 있었기에 오늘의 삶이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며 한해 마지막날 가족과 친구, 이웃에게 받은 감사를 찾아보고 삶의 중요한 인연들을 더듬어 사랑으로 보답하자.
새해 갑오년에는 시카고 온 누리에 평화와 만복이 깃들기를 소원하며 만사형통을 하나님께 기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