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6 19:59

아들 생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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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생일날.jpg

 

 

 

<이향신 권사 /서울 청운교회>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 첫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왔다. 지난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던 길섶을 지나 뒷동산 언덕에 있는 억새풀 사이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사진을 찍어 아직 늦잠을 자고 있을 서울의 친구와 형제들에게 카톡으로 고향 소식을 전한다.

 

홀로 계신 아버지가 아침준비를 하시다가 추운데 이렇게 일찍 왔냐면서 반기신다. 나는 가능한 아버지와 한 끼라도 더 밥상을 마주하고 싶어 식전에 오려고 노력한다준비해온 반찬과 아버지가 끓여 놓으신 우거지 국을 떠서 아침을 먹는다. 김장 때 남은 무를 헛간에 보관했는데 뻑뻑해 져서 삶아 무쳤더니 부드럽고 먹을만 하다시며 맛을 보라 하신다. 무나물도 아닌 무무침을 해 놓으신 거다. 치아가 약하셔서 이렇게 요리해 드시기 좋은 신가 보다어린 시절에는 조부모님과 함께 열 명이나 되는 식구가 밥상을 아랫목에서부터 윗목까지 3개를 펴놓고 밥을 먹었는데 모두 떠나간 자리에서 지금은 아버지 홀로 식탁에 앉아 드시는 것이다.

 

아버지는 스스로 믹스 커피도 타 드시고 사과도 손수 깎아 드신 후 걷어내지 않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시더니 누워서 책을 읽으신다. 설거지를 끝낸 나도 시린 발을 녹인다는 핑계로 아랫목을 찾는다. 때 마침 원주에 살고 있는 아들 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저를 낳아 주셔서 고마워요

이이? 생일 축하해! 네가 태어나줘서 내가 고맙지. 고맙다 전화 줘서... 나 지금 시골 할아버지 집에 왔어

 

그리고, 할아버지를 바꿔주니 귀가 어두워도 외손자 목소리에 반가워 표정이 환해 지신다. 마침 아들의 생일에 전화를 받아 할아버지를 바꿔 드릴 수 있으니 참 좋다. 돌아가신 엄마가 언제부터인가 전화를 드리면 고맙다고 하시더니 나도 어느새 전화를 주는 자식이 고마운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귀한 선물로 딸과 아들을 주셨다. 두 아이 모두 병원이 아닌 집에서 출산을 했던 것이다. 딸을 낳을 때는 서울에 살던 집에서 교회 권사님이 해산을 도와 주셨고 아들은 지금 아버지가 살고 계신 이 고향집에서 낳았다. 어느새 40년 전 오늘 일이다.

 

문득, 내 아들이 태어나던 날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일을 하셨는지 새삼스레 생각이 난다. 그날 이른 아침부터 진통이 온다고 하니 어머니는 아버지를 시켜 아랫마을 사는 산파를 불러 오도록 하셨다. 전화도 없으니 산파를 부르러 달려가셨을 아버지가 왜 오늘에서야 생각이 날까사십 년 전, 지금 보다야 훨씬 젊은 시절의 아버지였으니 잊었던 건가. 그리고 커다란 가마솥에 군불을 떼서 방을 덥히고, 물을 데워 대야에 떠서 뜰과 마루를 지나 장지문을 열고 신생아 목욕물을 갖다 주신 아버지 모습이 그려지면서 정말 고마움을 새삼 느낀다.

 

몸을 추스르고 창호지 문에 붙은 손바닥만 한 작은 유리 너머로 밖을 내다보니 대문에 금줄이 걸린 게 보였었다. 외손자를 본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걸어 놓으셨을 금줄은 짚으로 꼰 새끼줄에 빨간 고추와 소나무 가지, 그리고 숯을 번갈아 가며 꿰어 대문에 걸어놓은 것이다. 오랜 풍습으로 이 집에 아기가 태어났다는 뜻도 있고 산후조리를 하는 집에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함이였을 것이다. 어른들은 그것을 부정 탈까 봐 그런다고 하셨다.

IMG_1645.JPG

<금줄: 이향신 권사님이 직접 색연필로 그린 그림>

 

입춘이 갓 지난 떄였지만 겨울 끝의 매서운 날씨에 아버지는 탯줄을 묻기 위해 언 땅을 파셨을 것이다. 그리고 딸과 외손자를 연결해 주었던 생명줄인 태를 묻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보니 궁금하다. 평온하게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으시는 아버지께 손자 낳던 날 얘기를 하니 나는 그 때 일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데하신다. 늦어도 한 참 늦은 사십 년이 흐른 후 오늘에서야 아버지의 수고에 고마움을 알았으니 사랑을 베푸신 아버지는 벌써 잊으신 것인가. 그 동안 산후조리 해주신 친정어머니만 고생하셨다 생각했는데 옆에서 거들고 함께 하셨던 아버지의 은혜를 깨닫게 해 준 고마운 나의 아들 생일날이다. 그래도 아버지 살아 생전 깨달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렇게 나는 우둔하여 아직도 내가 받은 사랑에 대하여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일이 또 얼마나 많을까.  사십 년 전 일 뿐 아니라 어제, 그리고 오늘 이 순간에도 감사해야 할 조건들이 수없이 많음에도 무심히 지나치는 시간이 되는 건 아닌가. 오늘 이렇게 글을 쓰며 나를 돌아볼 수 있음을 감사한다.

 

그리고 하늘 소리를 통하여 미약한 나의 이야기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도 감사하며 먼 이국에서 하늘소리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여러분의 향기와 소리가 더욱 널리 퍼져 가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사진은 아들 생일날 고향 아산 뒷동산에서 직접 찍은 억새풀 사이로 떠오르는 새벽해 새벽 하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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