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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kaoTalk_20150915_140301573.jpg

 

<이향신 권사 / 서울 청운교회>

 

내 어린 시절 고향 옛집 뒤란에는 흙벽돌로 쌓은 높은 굴뚝이 있었는데 그 굴뚝을 능소화가 감고 올라가 꽃을 피웠다. 시골이라 들풀은 흔하지만 능소화는 보기 드문 꽃이었는데 그 꽃이 우리 집 굴뚝을 타고 올라가 피어오를 때면 먼발치에서 보아도 예쁘고 환한 꽃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았다. 더욱이 마을에서는 우리 집에만 유일하게 있었기에 마냥 자랑스러웠다. 그때는 능소화라는 이름도 모른 채 우리집꽃이라고만 생각하며 살았었고 사실 그 능소화라는 이름을 내가 알게 된 것도 몇 해 안 된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 능소화를 만난다. 맞은 편 길 건너의 중학교 운동장 가장자리 울타리는 높은 목재 방음벽인데 능소화가 그 벽을 타고 올라가도록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고가며 고향집 꽃을 보듯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을 한참씩 서서 바라보기도 하고 일부러 그 쪽 길을 택해 걸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꽃처럼 가까이 하지도 못하고 꽃향기만 맡는 것은 물론 꽃을 꺾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렸을 때 어른들이 저 꽃을 만지면 독이 있어서 꽃을 만진 손으로 눈을 비비면 눈이 멀게 된다고 해서 곱고 이쁘기는 해도 그저 쳐다만 보았던 기억 때문이다. 그래도 능소화 때문에 친근하게 만지고 먹고 놀이도 하던 꽃과 나무와 열매들이 한꺼번에 마구 생각이 난다.

 

그 중에서 특히 생각나는 꽃이 있다. 어린 시절 양지바른 황토 담 아래서 소꿉놀이를 하며 따먹던 노란 꽃인데 그 이름을 몰라 궁금했었다. 여러 사람에게 그 꽃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고 설명을 해도 아는 이가 없어 답답했는데 우연히 고향 선배 언니를 만나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선배는 마을에서 제일 큰 우리 집에 와서 감꽃을 주워가고 곤단초라고 하는 그 꽃을 따갔다고 했다.

 

곤단초또는 골담초라고도 하는데 개나리와 비슷하고 버선 모양을 해서 버선꽃이라고도 불렀다. 가지에 가시가 있어서 꽃을 따다가 가시에 찔리기도 했지만 먹으면 달짝지근하여 많이 따다 먹었었다. 그러고 보면 집안 울타리 안에 있는 우물가에 수북이 피어있던 곤단초는 어린 시절 가장 가까이서 보고 만지고 따 먹던 친근한 꽃이다. 엄마와 고모는 그 꽃을 따서 빵을 찔 때 밀가루에 버무려 넣기도 하고 떡에 예쁘게 고명으로 넣어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근자에는 샐러드용으로도 쓰인다고 하는데 나는 어린 시절 이후로 만나보지를 못하고 있다.

 

또 하나 검게 그을음이 있던 굴뚝 옆에 서 있던 감나무의 꽃은 유난히 크고 탐스러웠다. 이른 새벽 창호지 뒷문을 열고 땅바닥에 노랗게 떨어져있는 감꽃이 보이면 부리나케 뛰쳐나가곤 했다. 주워 입에 넣기도 하고 긴 풀줄기를 뽑아 감꽃을 꿰어 목걸이도 만들었는데 그 기억은 우리 네 자매에게 어린 나이에 화려한 목걸이를 해보는 멋쟁이의 추억을 선물했다. 그런가 하면 입에 넣고 씹으면 매콤해서 코끝이 매워지던 작고 하얀 냉이 꽃과 부드러운 하얀 털을 감싸고 올라오는 삘기도 뽑아 먹었다.

 

토끼풀은 반지와 팔찌를 만들고 꽃을 엮어 머리띠도 하고 아카시아 나무의 새 순이 연한 밤색으로 통통하게 올라올 때면 툭 꺾어 껍질을 벗겨 먹었다. 그뿐인가. 연하던 새 순이 뻣뻣하게 조금씩 억세어질 무렵 하얗게 탐스럽게 핀 아카시아 꽃을 발뒤꿈치를 들고 가시 돋은 가지를 잡고 입으로 꽃을 따 머금으면 달콤하고 향기로운 맛이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작은 언덕 너머 과수원 울타리에는 통통하고 연한 찔레와 칡 순이 많았는데 그것도 꺾어 껍질을 까 질겅질겅 씹어 먹곤 했다. 소나무의 겉껍질을 까고 물오른 속껍질을 먹는 생키는 만지고 나면 끈적끈적한 진액이 묻어 손에 때가 끼었고, 솔향기 그윽한 나무에서 노란 송화 가루를 받아 입에 넣으면 입언저리에 노란 가루가 묻어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웃던 친구들도 생각난다. 우리가 열심히 따 온 송화 가루로 어머니는 다식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지랑풀, 또는 지장풀이 길가에 길게 자랐을 때는 길가에 앉아 양쪽에 묶어 놓고 친구들이 발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을 보는 장난도 했다. 그뿐 아니라 길게 늘어진 풀잎으로 댕기머리를 땋는 놀이도 했다. 그것의 줄기를 쭉 뽑으면 밑 부분의 넓고 하얀 부분이 나오는데 씹으면 그것도 단맛이 나 그 또한 우리의 먹거리가 되었다. 지금은 집 앞까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버렸지만 질경이와 지랑풀이 억세게 자라 이른 아침 그 길로 지나만 가도 이슬에 발등이 젖던 그 옛길이 새삼 그리워진다.

 

아카시아 잎으로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한 잎씩 손가락으로 튕겨 떼어내는 놀이도 기억이 난다. 또 훑어낸 줄기를 머리 끝 부분에 대고 둘둘 만 다음 끝을 여미고 묶어 파마놀이를 하면 한참 후엔 정말 머리가 곱슬곱슬 해졌다.

 

아버지는 텃밭에 길게 늘어서있는 당수수 (사탕수수)를 베어다 먹기 좋은 길이로 잘라 주시고 우린 그 껍질을 벗겨 달달한 물기를 즐겨 먹었다. 껍질을 벗기느라 손을 베기도 하고 채 까지 못한 게 있어 입술을 베일 때도 있었지만 아직 과일이나 곡식이 나오기 전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뿐인가 밭에서 자라는 농작물도 우리의 소꿉놀이 겸 간식거리로 즐겨 먹었다. 마늘대가 올라오면 밭에 들어가 마늘쫑을 쭈욱 뽑아 당겨 빼낸 후 씹어 먹으면 매콤했는데 장독대에 있는 고추장 항아리를 열어 고추장에다 찍어먹을 때도 있었다. 밀밭에 들어가 여물어가는 밀을 따서 한참 입안에서 우물거리면 껌처럼 되어 껌이라고 먹으며 놀기도 했다. 누렇게 벼가 익어갈 무렵에는 허옇게 윗몸을 드러낸 가을무를 뽑아 손톱으로 껍질을 돌려 까면 입에선 군침이 돌고 한 입 베어 물면 달작 시원 맛이 좋았다.

 

텃밭에 열린 연한 가지도 생으로 따먹었다. 전기도 안 들어오고 TV도 없던 시절이지만 우리는 울타리 안에서도 놀 거리가 많았고, 들이나 산, 밭에서까지 뛰어놀며 놀이하며 먹거리도 마련했던 요즘 아이들은 상상도 못할 아름다운 어린 시절이었다. 어느 날 유치원 다니는 일곱 살 된 손녀 예봄이가“할머니는 어느 유치원 다녔어요?”하고 물었다. 할머니도 저처럼 유치원을 다닌 걸로 알고 그 이름이 궁금했나보다. “ 응 할머니는 유치원은 안가고 들이나 산이나 마당에서 친구들과 뛰어 놀았단다”했더니 잘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갸웃 했다. 그러고 보니 내 어린 시절의 유치원은 바로 자연학교였던 것이다.

 

능소화는 꽃말이 명예인데 시들은 모습을 보이기 싫어 꽃이 활짝 피었을 때 뚝 떨어진다 하여 양반 꽃이라고도 하듯이 가까이 하기엔 먼 꽃이지만 내 마음 어린 시절 가장 화려하게 새겨진 기억의 꽃이다, 하지만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아도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부터 우리의 소꿉놀이 친구가 되고 입맛을 다시게 하던 곤단초며 감꽃, 아카시아 꽃과 찔레 순, 송화며 지랑풀 그리고 삘기 등 친구도 되고 먹을거리도 되어주었던 꽃과 들풀들이 마냥 그리워진다.

 

문득 화려한 능소화보다는 소박한 들꽃들의 다정함같이 나도 사람들에게 그런 다정하고 부담 없고 따뜻한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 어린 날의 고향 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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